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필리핀 빌리비드(BILIBID) 수용소
일본군은 1941년 12월 진주만 기습으로 제2차 세계대전을 일으키자마자 필리핀에 위치한 미군의 주요 항공기지를 공습하고 필리핀에 상륙했고, 1942년 5월을 기점으로 필리핀 전역을 장악하게 된다. 이와 함께 마닐라를 비롯한 필리핀 주요 도시에 50여 곳의 위안소가 만들어졌으며, 조선인 뿐 아니라 일본인과 중국인 ‘위안부’들이 이곳으로 끌려왔다. 이 같은 사실은 필리핀 현지인을 통해서도 확인된다. 필리핀인을 심문한 미군의 보고서에 따르면 필리핀 일로일로(iloilo city)에는 2곳의 위안소가 있었으며, 이곳의 ‘위안부’들은 일본군의 통제 하에 있었다. 한편 미군은 1944년 10월부터 필리핀 탈환을 목적으로 레이테섬 지역에 대한 공격에 나섰고, 같은 해 12월 레이테섬을 탈환했다. 레이테섬 탈환을 기점으로 1945년 1월에는 루손섬에 상륙했고, 1945년 2월에는 마닐라를 탈환했다. 이 사진은 필리핀을 점령했던 일본군이 군용교도소로 사용했던 빌리비드 수용소를 찍은 항공사진이다. 지붕 위에 적십자 표시가 있는 곳이 빌리비드 수용소다. 미(美) 해병대 소속 사진병인 스카라멜리노(Cpl. E. Scaramelino) 상병이 1945년 3월 9일 촬영했다. 일본군 점령 하에서는 미군 전쟁포로들이 이 수용소에 구금되었으며, 미군이 필리핀을 재점령한 이후에는 민간인 포로들의 수용소로 활용되었다. 조선인 ‘위안부’였던 김소란(가명)을 비롯한 5명의 조선인 ‘위안부’들 역시 1945년 5월 19일 포로로 잡힌 후 이곳에 처음 수용되었다. 이들 여성을 심문한 미군의 보고서 역시 남아있는데 이에 따르면 김소란(가명)을 포함한 5명의 조선인 ‘위안부’들은 1944년 4월 29일 다른 일본인 및 조선인 여성들과 함께 필리핀에 있는 일본 육군의 ‘위안부’로 끌려왔다. 이후 김소란(가명)은 여러 수용소를 이동한 끝에 1945년 10월 29일 필리핀에서 마리호(Mari)를 타고 일본을 경유해 부산으로 귀국했다.
상위계층 : 미 해병대 기록
고유번호 : IT9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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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키나와 코자 캠프의 조선인 '위안부'
흔히 오키나와로 불리는 오키나와현(沖繩懸)은 일본의 남서쪽 끝에 위치하며, 가장 많은 인구가 거주하는 오키나와 본섬을 비롯해 100여개가 넘는 섬으로 이루어져 있다. 이곳 오키나와에 본격적으로 일본군이 주둔한 것은 1944년 3월이었다. 1944년 2월 미군이 미크로네시아의 트럭섬과 마리아나제도의 괌, 사이판, 티니안 등을 공격하자, 압박감을 느낀 일본군은 일본 본토 남서 방면을 방어하기 위해 오키나와 수비군인 제32군을 창설했다. 이에 따라 전쟁의 막바지였던 1944년, 10만 명이 넘는 일본군 병력이 중국 만주와 일본 본토로부터 오키나와로 집결했다. 이미 중국에서 위안소를 경험한 군인들이 오키나와로 이동했기 때문에 일본군은 이들을 상대할만한 ‘위안부’가 필요하다고 판단했고, 오키나와 각지에 위안소를 만들어 ‘위안부’를 동원하기 시작했다. 그 결과 1944년부터 1945년 종전에 이르기까지 오키나와에 100개가 넘는 위안소가 세워졌다. 1945년 3월, 오키나와에서 일본군과 미군 간의 전투가 본격적으로 시작되었다. 1945년 3월 22일 오키나와 본섬 서쪽의 게라마제도(도카시키섬, 자마미섬, 아카섬)를 시작으로 오키나와를 공격하기 시작한 미군은, 곧 이은 1945년 4월 1일 중부 요미탄 방면으로 오키나와 본섬에 상륙해 북부와 남부를 차례로 점령했다. 일본군의 조직적 저항이 붕괴한 6월 23일에 이르기까지 약 3개월 여간 지속된 이 전투는 태평양전쟁 시기 일본 영토 내에서 벌어진 유일한 장기전으로(항복서명은 9월 7일 이루어졌다), 사망자 수만 20만 명에 달했다. 이 중 민간인 희생자가 94,000명이 넘었고, 현지에서 소집된 방위대원 등을 포함한 주민 사망자가 약 18만 명으로 오키나와 전체 인구의 3분의 1에 이르렀을 뿐 아니라, 28만 명이 넘는 주민이 수용소에 구금될 정도로 민간인들의 피해가 컸다. 일본군에게는 미군의 본토 상륙을 지연?저지하기 위한 방파제 구축에 있어, 미군에게는 일본 본토 침공을 위한 교두보 확보에 있어 전략적으로 장소가 바로 오키나와였기 때문이다. 이 사진은 1945년 11월 미군의 군정활동보고서에 첨부된 사진으로 오키나와 코자 수용소에서 조선으로의 송환을 기다리고 있는 조선인 ‘위안부’들을 촬영한 사진이다. 촬영자는 확실치 않다. 사진 아래에는 일본군에 의해 오키나와로 끌려온 조선인 ‘위안부’들이 코자 수용소에 모여 11월에 있을 조선으로의 송환을 기다리고 있으며, 이 여성들은 오키나와로 끌려왔을 때부터 고국으로 돌아갈 때까지 미군정을 괴롭히는 문제 중 하나였다는 설명이 덧붙여져 있다. 이 같은 시선은 사진이 첨부된 보고서에서도 나타난다. 미군은 군정보고서에서 공공의 안전과 관련한 한 가지 문제가 일본군이 오키나와에 남긴 조선인 ‘위안부’라고 지적하고, 조선으로 귀환하기 위해 오키나와 각지에서 조선인 ‘위안부’ 40명이 코자 수용소로 모였으며 나머지 류큐제도에서도 110명이 조선으로의 송환을 기다리고 있다고 기록했다. 오키나와 점령 후 통치를 맡은 미군과 미군정은 조선인 ‘위안부’를 공공의 안전과 지역의 보건 상황을 위협하는 요소이자 오키나와의 통치에 위협적인 존재로 생각하고, 이들을 조선으로 송환하는 데에 우선적으로 초점을 맞췄던 것으로 보인다.
상위계층 : 미 해군 작전 기록
고유번호 : IT1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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버마 미치나에서 "위안부"인지를 심문받고 있는 김(Kim) , 1944-08-03
이 사진은 전시정보국(Office of War Information, OWI) 레도 심리전팀 요원 칼 요네다(Karl Yoneda)가 포로로 잡힌 여성 ‘김’(Kim)을 비행장에 있는 헌병 구금소에서 심문하고 있는 장면이다. 육군 164통신사진중대 소속 시어러(Shearer)가 1944년 8월 3일 촬영했고, 1948년 8월 25일 공개되었다. 1944년 버마를 점령하고 있었던 일본군에 대한 연합군의 공격이 시작되었고, 이 과정에서 일본군과 조선인 여성들이 연합군에 포로로 붙잡혔다. 1944년 연합군이 버마 미치나(Myitkyina)를 공격하는 과정에서 조선인 ‘위안부’를 비롯한 민간인 여성들 또한 포로로 붙잡혔는데, ‘김’은 그러한 여성들 중 한명이었다. 사진 뒷면의 설명에 따르면 칼 요네다는 버마 미치나에서 포로로 잡힌 ‘김’이라는 이 여성이 ‘위안부’였을 가능성을 의심하며 일본군 "위안부"였는지 심문했으나, 실제 그녀는 버마 미치나에서 간호사(nurses aid)로 일했다. 이후 이 여성을 심문한 전시정보국 심리전팀 소속 아쿠네 켄지로(T/4 Akune Kenjiro)는 <전시정보국 전초기지 보고서 JRA-126>에서 미야모토 키쿠에(Miyamoto, Kikuye)라는 창씨명을 가진 28살의 이 조선인 여성이 제2야전병원 소속 간호사였다고 밝히고 있다. 보고서는 그녀가 버마 미치나에서 포획될 당시 “조선인 위안부” 부대에 있었다고 시작하고 있으나, 이후 보고서에 나타난 진술에서 그녀가 ‘위안부’였거나 그 같은 일을 했다는 정황은 찾을 수 없다.
상위계층 : 미 육군통신감실 기록
고유번호 : IT13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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버마 미치나에서 미군에게 포로로 잡힌 조선인 "위안부"들 2 , 1944-08-14
이 사진은 원-로이-챈(Won-Loy Chan) 대위, 로버트 혼다(Robert Honda) 병장, 그랜트 히바라야시(Grant Hirabayashi) 병장이 미치나(Myitkyina) 근처에서 포로로 잡힌 3명의 조선인 ‘위안부’를 심문하는 장면을 촬영한 것이다. 육군 164통신사진중대 소속 시어러(Shearer)가 1944년 8월 14일 촬영했다. 사진 속 여성들은 1944년 8월 버마 미치나에서 연합군에게 포로로 잡힌 조선인 ‘위안부’ 20명 가운데 3명으로, 이들을 촬영한 다른 사진도 존재한다. 챈 대위는 이들 여성들로부터 일본군 군사정보를 얻고자 했으나, 대부분이 일본어를 유창하게 말하지 못해 큰 도움을 얻지는 못했다. 그는 심문과정의 여러 에피소드들을 자신의 회고록 『Burma: The Untold Story』(1986)에 상세히 서술했다. 이들 조선인 ‘위안부’는 8월 10일에 붙잡혀 5일간 이곳에 머물다가 8월 15일 레도로 보내졌다. 이 여성들을 심문한 결과는 미국 전시정보국(Office of War Information, OWI) 심리전팀이 작성한 〈일본인 포로 심문보고서 49호〉다. 영국의 동남아시아번역심문센터(South East Asia Translation and Interrogation Center, SEATIC)가 작성한 〈심리전 회보 2호〉에서도 이들에 대한 정보를 확인할 수 있다. 두 보고서에 따르면 이 여성들은 일본군의 요청을 받은 업자들의 취업사기 또는 강압에 의해 위안소로 간다는 사실을 모른 채 1942년 버마로 끌려왔고, 미치나에 있었던 3개의 위안소 중 교에이 위안소에 머물렀다.
상위계층 : 미 육군통신감실 기록
고유번호 : IT13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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버마 미치나에서 미군에게 포로로 잡힌 조선인 "위안부"들 1 , 1944-08-14
이 사진은 버마 미치나(Myitkyina)에서 전쟁포로를 담당한 중국계 미국인 정보장교 원-로이-챈(Won-Loy Chan) 대위 등이 포로가 된 일본군 ‘위안부’와 함께 있는 장면을 촬영한 것이다. 육군 164통신사진중대 소속 시어러(Shearer)가 1944년 8월 14일 촬영했다. 사진 속 여성들은 1944년 8월 버마 미치나에서 연합군에게 포로로 잡힌 조선인 ‘위안부’들이다. 챈 대위는 이들 여성들로부터 일본군 군사정보를 얻고자 했으나, 대부분이 일본어를 유창하게 말하지 못해 큰 도움을 얻지는 못했다. 그는 심문과정의 여러 에피소드들을 자신의 회고록 『Burma: The Untold Story』(1986)에 상세히 서술했다. 사진은 이 여성들이 머물렀던 미치나 서쪽 비행장에 설치된 임시수용소에서 촬영된 것으로, 사진 왼쪽의 미군은 앞에서부터 차례로 원-로이-챈 대위, 로버트 혼다 병장, 그랜트 히바라야시 병장, 그리고 하워드 후루모토 병장이다. 오른쪽에 앉아있는 여성 20명은 조선인 ‘위안부’로 이들을 촬영한 다른 사진도 있다. 이들은 8월 10일에 붙잡혀 5일간 이곳에 있다가 8월 15일 레도로 보내졌다. 이 여성들을 심문한 결과는 미국 전시정보국(Office of War Information, OWI) 심리전팀이 작성한 〈일본인 포로 심문보고서 49호〉다. 영국의 동남아시아번역심문센터(South East Asia Translation and Interrogation Center, SEATIC)가 작성한 〈심리전 회보 2호〉에서도 이들에 대한 정보를 확인할 수 있다. 두 보고서에 따르면 이 여성들은 일본군의 요청을 받은 업자들의 취업사기 또는 강압에 의해 위안소로 간다는 사실을 모른 채 1942년 버마로 끌려왔고, 미치나에 있었던 3개의 위안소 중 교에이 위안소에 머물렀다.
상위계층 : 미 육군통신감실 기록
고유번호 : IT13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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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국 송산의 일본군 "위안부" 2 , 1944-09-03
이 사진은 중국 윈난성 송산에서 살아남아 중국군에 의해 포로로 붙잡힌 일본군 ‘위안부’를 찍은 것이다. 육군 164통신사진중대 소속 햇필드(Pvt. Hatfield)가 1944년 9월 3일 촬영했다. 중국 윈난성 송산과 텅충은 충칭에 있는 장제스의 국민당군을 지원하기 위해 연합군이 거쳐 가야만 했던 곳으로, 2차 세계대전 당시 이곳을 둘러싼 일본군과 연합군의 전투가 치열했다. 1944년 6월 Y군(미중연합군)은 버마도로를 탈환하기 위해 중국과 버마의 접경지대인 윈난성 송산과 텅충의 일본군 점령지에 대한 공격을 시작했고, 같은 해 9월 7일 송산을 함락시켰다. 당시 송산 지역을 수비하던 일본군 수비대는 격렬한 저항을 하였는데, 사진 속 여성은 이 같은 전투 과정에서 살아남아 포로로 붙잡힌 것으로 보인다. 사진 뒷면의 설명에 따르면 중국군 8군이 송산 지역 야산에서 포로로 잡은 이 여성은 일본인 여성(Japanese girl)으로, 일본군이 전멸한 토굴의 한 구석에 숨어있다 중국군에 의해 발견되어 포로로 붙잡혔다. 여성 옆에 있는 중국군은 이 여성의 포획사실을 알리기 위해 군사령부로 전화를 하고 있다. 당시 치열한 격전지였던 송산 지역에서 일본군과 함께 있었던 많은 ‘위안부’들이 폭격과 학살 등으로 사망했는데, 이 여성은 그 가운데 살아남아 연합군에게 발견되었다.
상위계층 : 미 육군통신감실 기록
고유번호 : IT1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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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국 송산의 일본군 "위안부" 1 , 1944-09-03
이 사진은 중국 윈난성 송산에서 중국군에 의해 포로로 잡힌 일본군 ‘위안부’ 4명을 찍은 것이다. 미 육군 164통신사진중대 소속 햇필드(Pvt. Hatfield)가 1944년 9월 3일 촬영했다. 2000년 12월 도쿄에서 열린 ‘2000년 일본군 성노예 전범 여성국제법정’에서 박영심이 사진의 가장 오른쪽에 있는 만삭의 여성이 본인임을 증언해 ‘박영심 사진’으로도 널리 알려져 있다. 사진을 촬영한 햇필드는 일본군과 함께 있었던 이들을 일본인으로 오인해 사진 뒷면에서 이들 여성을 일본 여성(Jap Girls)이라고 설명하고 있으나, 이는 잘못된 것이다. 중국-버마-인도 전구(CBI, China-Burma-India Theaters)의 미군 신문인 《라운드 업Round up》 보도기사, 송산과 텅충을 점령한 Y군(미중연합군) 작전일지, 포로심문보고서, 조선인 ‘위안부’를 촬영한 영상, 그리고 무엇보다 그 곳에서 생존한 박영심의 증언에 따르면 사진 속 여성들 중 일부는 조선인 ‘위안부’였다. 이들 여성의 모습을 담은 영상은 <중국 윈난성 송산의 조선인 "위안부"들>이다. 박영심을 비롯한 4명의 여성은 송산과 텅충 지역에서 생존한 나머지 여성들과 함께 쿤밍 포로수용소에 약 7개월간 수용되었다가 이후 연합군에 의해 충칭을 거쳐 조선으로 귀환했다.
상위계층 : 미 육군통신감실 기록
고유번호 : IT1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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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국 송산의 일본군 "위안부" 3 , 1944-09-07
이 사진은 중국 윈난성 송산에서 살아남아 중국군에 의해 포로로 잡힌 일본군 ‘위안부’를 찍은 사진이다. 육군 164통신사진중대 소속 햇필드(Pvt. Hatfield)가 1944년 9월 7일에 촬영했고, 1946년 7월 15일에 공개되었다. 사진 뒷면의 설명에 따르면 사진 속 여성은 송산 야산의 동굴에서 발견되었으며, 일본군은 동굴을 지키다 전멸했다. 사진으로 포착된 순간은 중국군이 일본군을 공격하는 과정에서 부상을 입고 발견된 이 여성에게 미군 틴슬리(T/5 Myer L. Tinsly)가 도움을 주는 장면이다. 뒤에 있는 2명의 중국군이 전투과정에서 노획한 일본기를 들어 보이고 있다. 이 여성은 ㅇㅇ 영상에서도 확인할 수 있다.
상위계층 : 미 육군통신감실 기록
고유번호 : IT13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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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국 송산의 일본군 "위안부" 4 , 1944-09-08
이 사진은 연합군이 중국 윈난성 송산에서 포로로 잡은 "위안부"들을 심문하는 장면을 촬영한 것이다. 육군 164통신 사진중대 소속 코쿠렉(Kocourek)이 1944년 9월 8일 촬영했고, 1946년 7월 15일 공개되었다. 사진 뒷면의 설명에 따르면 중국군 8군 사령부 일반참모 신카이(Shin-Kai) 대위와 미군 연락팀 빅슬러(Arhtur L. Bixler) 병장이 송산에서 포로로 잡은 조선인 여성들(Korean women)을 심문하고 있는 장면이다. 포로로 붙잡힌 당일 이들 여성을 촬영했던 햇필드(Pvt. Hatfield)가 이들을 일본 여성으로 본 것과 달리, 심문 장면을 지켜본 코쿠렉은 이 여성을 조선인이라고 기록했다. 사진의 왼쪽에서 두 번째로 앉아있는 여성은 박영심과 함께 일본군 진지에서 탈출해 붙잡힌 4명의 여성 가운데 한명으로, 햇필드가 촬영한 <중국 송산의 일본군 ‘위안부’ 1>과 조선인 ‘위안부’를 촬영한 18초 남짓의 ㅇㅇ 영상 속에서도 발견된다. 이들 사진과 영상 모두 미 육군 통신감실 기록철에서 확인할 수 있다. 만삭이었던 박영심은 보이지 않는데, 다른 곳에서 치료를 받고 있었기 때문으로 추정된다. 송산에서 포로로 잡힌 여성들은 간단한 심문을 거쳐 쿤밍 포로수용소에 약 7개월간 수용되었다가, 이후 연합군에 의해 다른 조선인들과 함께 충칭을 거쳐 조선으로 귀환했다.
상위계층 : 미 육군통신감실 기록
고유번호 : IT13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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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국 텅충에서 학살된 조선인 "위안부" 2 , 1944-09-15
이 사진은 중국 윈난성 송산 근처 텅충성 안팎에서 벌어진 Y군(미중연합군)과 일본군의 전투 결과를 찍은 사진이다. 미 육군 164통신사진중대 소속 맨워렌(Manwarren)이 1944년 9월 15일 촬영했다. 맨워렌은 승리를 기념하는 미중연합군의 모습, 파괴된 텅충성, 사망한 일본군과 민간인 여성 및 아이들 등 치열한 전투의 결과를 여러 장의 사진으로 포착했고, 이 사진은 그 중의 한 장이다. 사진 뒷면의 설명에 따르면 이는 텅충성 함락 이후인 9월 15일, 중국군의 기습으로 텅충성 안에서 사망한 일본군과 여성의 사체를 촬영한 것이다. 시체의 모습을 직접적으로 담고 있어 온라인을 통해 공개하지 않으며, 서울기록원에 직접 방문시 열람할 수 있다. Y군(미중연합군) 작전일지에 따르면 사진 속 여성들은 조선인 ‘위안부’로 보인다. 1944년 7월 30일 Y군(미중연합군)은 텅충에 20명의 ‘위안부’가 있다는 일일보고를 작성했고, 9월 9에는 텅충의 “마을에는 중국인 민간인 60명과 조선인 ‘위안부’ 30명이 있었다”는 일본군 포로의 진술을 보고했다. 또한 9월 15일 일일보고에는 Y군(미중연합군)이 13명의 여성을 생포했으며 일본군이 조선인 30명을 총살했다는 내용이 포함되어 있다. 이 내용은
에서 확인할 수 있다. 이 장면을 촬영한 영상도 남아 있다. 상위계층 : 미 육군통신감실 기록
고유번호 : IT1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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