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항공사진 속 용산기지

공중에서 본 용산과 용산기지 일대 항공사진, 1945-09-04[서울기록원 기록건 C0199]
사진을 보면 미군항공단 소속 콜세어(Corsair, F4U) 아래로 남산과 일본군 용산기지 기병대, 포병연대뿐만 아니라 왼쪽에 용산역과 조병창 등 주요 건물들을 한눈에 볼 수 있다. 1945년 8월 15일 이후 오키나와에서 출발한 비행단은 작전 블랙리스트 3단계*에 따라 각 지역을 점령하기 위해 파견했다. 이 정찰대는 인천을 시작으로 경성과 남쪽 지역의 항공사진들을 남겼다.
*1단계 당시 경성과 그 일대, 2단계 부산과 그 인근 도시, 3단계 나머지 도시들

안내사항

※항공사진에 표시된 주요 장소와 관련한 사진은 1945년 이후에 촬영되었다. 이 사진은 서울기록원이 2022년 소장기록물 정리·기술 사업을 통해 미국 국립문서기록관리청(NARA)에서 수집·발굴한 사진이다.

※용산미군기지는 3개 지역 메인 포스트(Main Post), 사우스 포스트(South Post), 캠프 코이너(Camp Coiner)로 구분되어 있다. 용산미군기지 북쪽에 있는 ‘메인 포스트’는 주한미군사령부, 한미연합사령부 등이 있고, 남쪽의 사우스 포스트에는 주거시설을 비롯한 병원 및 편의 시설 등이 있다.

[용산기지 메인포스트]최상위 지도
  • #01 미육군 제7보병사단 제31연대

    미31보병연대의 육군기념일 행사, 1948-04-06

    미31보병연대의 육군기념일 행사, 1948-04-06
    이 사진은 1948년 4월 6일 미31보병연대의 육군기념일 행사에서 미7사단장이 바탄전투 때 불타버린 전투 깃발을 달아 주는 장면이다.

    * 바탄전투(Battle of Bataan, 1942.1.2~5.6)는 일제가 태평양 전쟁기 필리핀을 점령하기 위해 벌인 전투다. 특히 바탄 죽음의 행진은 일본군의 전쟁범죄를 잘 말해주는데, 1942년 4월 일본군이 바탄 반도 점령 후 7만여 명의 연합군 포로들을 잡아 120㎞를 강제 이동시키면서 연합군 포로들을 희생시킨 사건이다. 일본은 필리핀을 수중에 넣고 이후 전쟁수행기지 및 남태평양 침공을 위한 전진기지로 사용하였다.

    * 장소 연혁: 일본군 제79연대 주둔지 > 미육군 제7보병사단 31연대 주둔지 > 대한민국 육군본부 > 전쟁기념관(현재)
    [서울기록원 기록건 CY0008]

  • #02 미육군 제7보병사단 제31연대

    미육군 제7보병사단 특수근무부대 장병 행진, 1948-06-05

    미육군 제7보병사단 특수근무부대 장병 행진, 1948-06-05
    이 사진은 1948년 6월 5일 미독립기념일을 맞아 특수근무부대 소속 장병들이 행진하는 모습이다. 이 곳은 일제강점기 일본군 보병 제79연대 주둔지였다. 대한민국 육군본부 주둔지를 거쳐 현재는 용산 전쟁기념관이 들어서 있다. 사진 속에 보이는 건물 가운데 한 동은 현재도 그대로 남아있다.

    * 장소 연혁: 일본군 제79연대 주둔지 > 미육군 제7보병사단 31연대 주둔지 > 대한민국 육군본부 > 전쟁기념관(현재)
    [서울기록원 기록건 CY0012]

  • #03 미육군 제7보병사단 제31연대

    미육군 제7보병사단 훈장 수여식, 1947-05-01

    미육군 제7보병사단 훈장 수여식, 1947-05-01
    용산미군기지 내 제7보병사단의 사열 중, 사단장 브루스 소장이 장병들에게 훈장을 수여하는 장면이다. 사진이 촬영된 장소는 현 용산미군기지의 메인 포스트와 전쟁기념관 사이다. 제7보병사단은 맥아더 포고령 제1호에 따라 광복 직후 38도선 이남 일본군의 항복 접수와 무장해제를 위해 용산기지에 진주했던 부대다. 제7보병사단은 1945년 9월부터 1948년 12월까지 용산기지에 주둔하며 38선 경계임무를 비롯해 경기도, 강원도 일대 군정을 펼쳤다. 1949년 초 한국에서 철수했으나 6‧25전쟁으로 인천상륙작전에 다시 참전한 이래, 1971년까지 한국에 주둔하였다.

    * 장소 연혁: 일본군 제79연대 주둔지 > 미육군 제7보병사단 31연대 주둔지 > 대한민국 육군본부 > 전쟁기념관(현재)
    [서울기록원 기록건 CY0001]

  • #04 미육군 제7보병사단 사령부

    미국 독립기념일 미육군 제7보병사단 지휘부 사열, 1948-06-05

    미국 독립기념일 미육군 제7보병사단 지휘부 사열, 1948-06-05
    미국 독립기념일을 기념하기 위한 행진 중 미육군 제7보병사단 지휘부가 사열을 하는 장면이다. 사진 속 앞 열 왼쪽에서 두 번째 인물은 제7보병사단을 지휘했던 피번 준장이다. 1895년 캔사스 킹슬리 출신으로, 프랑스와 독일 전선을 거쳐 한국 부임 직전 제10기갑사단 A전투사령부 지휘관을 맡았다. 1958년 플로리다 주 세인트 피터스버그에서 사망했고, 현재 미국 알링턴 국립묘지에 안장되어 있다.
    [서울기록원 기록건 CY0013]

  • #05 미육군 제7의무대대

    제7의무대대 본부를 방문한 조선국방경비대, 1948-09-02

    제7의무대대 본부를 방문한 조선국방경비대, 1948-09-02
    1948년 9월 2일 조선경비대 요원들이 용산미군기지의 미군 제7의무대대를 방문한 장면이다. 이 일대는 일제강점기 일본군 제78보병연대가 주둔했던 곳으로 현재의 메인 포스트 일대다. 사진 왼쪽 상단에 '제7의무대대 본부(HEADQUARTERS 7th MEDICAL BATTALLION)'라고 쓰여 있다.
    [서울기록원 기록건 CY0016]

  • #06 용산기지 소방서

    용산기지 소방서 모습, 1948-04-29

    용산기지 소방서 모습, 1948-04-29
    1948년 4월 29일 용산기지 내 소방서 모습이다. 자세히 보면 뒷면 설명에는 '캠프 서빙고(CAMP SOBINGGO)'라고 적혀 있다. 광복 직후 용산기지에 진주했던 미육군 제7보병사단은 이곳을 '용산기지'로 부르지 않고, 역사적 지명을 차용하여 '캠프 서빙고'라고 불렀다. 캠프 서빙고라는 명칭은 6·25전쟁 때까지 사용되었다. 오늘날 우리가 부르는 용산기지(Yongsan garrison)는 6·25전쟁이 끝날 무렵 미8군 사령부가 용산에 주둔하면서 새롭게 명명한 이름이다. 6·25전쟁 이후 미8군은 용산기지를 용산 군용지(Yongsan Military Reservation), 용산 컴파운드(Yongsan Compound), 미8군 사령부(EUSA) 등 다양한 명칭으로 불러왔다.
    [서울기록원 기록건 CY0010]

  • #07 미육군 제7보병사단 야전포병대

    제57야전포병대 장병 훈련, 1948-03-05

    제57야전포병대 장병 훈련, 1948-03-05
    1948년 3월 5일 미육군 제7보병사단 제57야전포병대가 훈련을 하는 모습이다. 장소는 현 용산미군기지 캠프 코이너(Camp Coiner)이다. 이곳은 임오군란 때 청나라 군대가 주둔해 흥선대원군을 납치했던 장소이며, 일제강점기에는 일본군 제26야포병연대가 위치했던 곳이었다. 광복 직후 미육군 제7보병사단이 용산기지로 진주하면서, 미육군 제7보병사단 예하의 야전포병부대들(48, 49, 57 포병대대)이 일본군이 사용했던 병영과 시설들을 그대로 재활용해 주둔하며 훈련을 했다.

    * 장소 연혁: 용산연병장 > 일본군 제26야포병연대 주둔지 > 미육군 제7보병사단 야전포병대 주둔지 > 대한민국 육군포병학교 > 캠프 코이너
    [서울기록원 기록건 CY0002]

  • #08 미육군 제7보병사단 야전포병대

    곡사포 교육을 받는 국군장교들1, 1948-09-09

    곡사포 교육을 받는 국군장교들1, 1948-09-09
    1948년 9월 9일 국군 장교들이 미군 제48야전포병 장병들로부터, 105미리 M3곡사포 사용법을 교육받는 모습이다. 이곳은 현 용산기지의 캠프 코이너이다. 대한민국 정부 수립 직후 주한미군이 단계적으로 철수하면서, 국군은 미군의 무기와 장비를 이양받게 된다. 그런 가운데 국방부는 1948년 9월 5일부터 장은산 소령을 중심으로 육군포병훈련소를 이곳에 설치하였다. 이 듬해 주한미군이 모두 철수하면서, 이곳은 대한민국 육군 포병의 요람지로 바뀌게 된다. 6·25전쟁 발발 직전에는 진해에 있던 김계원 장군이 용산 육군포병학교를 맡기도 하였다. 6.25 전쟁 영웅 고 김풍익 중령도 이곳 출신이다.(6·25전쟁 발발 당시 육군포병학교 제2교도 대대장).

    * 장소 연혁: 용산연병장 > 일본군 제26야포병연대 주둔지 > 미육군 제7보병사단 야전포병대 주둔지 > 대한민국 육군포병학교 > 캠프 코이너
    [서울기록원 기록건 CY0019]

  • #09 미육군 제7보병사단 제32연대

    제7의무대대 야구팀, 1948-03-18

    제7의무대대 야구팀, 1948-03-18
    1948년 3월 5일 현 용산미군기지 메인 포스트에 주둔하고 있던 미육군 제7보병사단 예하 제7의무대대 야구팀이다. 이곳은 일제강점기 일본군 제78보병연대가 주둔했던 곳이다. 해방 직후 일본군이 물러간 자리를 대신해 미육군 제7보병사단 예하의 제32보병연대가 주둔했다. 제7의무대대도 이 일대에 함께 주둔했던 것으로 보인다. 사진 속에 보이는 붉은 벽돌 건물은 현재 한미연합사에서 사용 중이다.

    * 장소 연혁: 일본군 제78연대 주둔지 > 미육군 제7보병사단 32연대 주둔지 > 미8군사령부
    [서울기록원 기록건 CY0005]

  • #10 미육군 제7보병사단 제32연대

    제32연대 전몰장병 추모일 행사, 1948-05-31

    제32연대 전몰장병 추모일 행사, 1948-05-31
    1948년 5월 31일, 미육군 제32연대 전몰장병 추모일에 장병들이 묵념을 하는 모습이다. 행사가 열린 곳은 제32보병연대 연병장이며, 일제강점기에는 일본군 제78보병연대 연병장이었다. 현재는 한미연합사 연병장으로 사용 중이다. 장병들 오른쪽 너머로 보이는 언덕은 이태원 일대이다.

    * 장소 연혁: 일본군 제78연대 주둔지 > 미육군 제7보병사단 32연대 주둔지 > 미8군사령부
    [서울기록원 기록건 CY0011]

  • #11 미육군 제7보병사단 제32연대

    제7의무대대 장병 부상병 훈련, 1948-03-18

    제7의무대대 장병 부상병 훈련, 1948-03-18
    1948년 3월 5일, 현 용산미군기지 메인 포스트에 주둔하고 있던 미육군 제7보병사단 예하 제7의무대대 장병들이 구급차에 부상병을 싣는 훈련 모습이다. 이곳은 일제강점기 일본군 제78보병연대가 주둔했고, 해방 직후 미육군 제7보병사단 예하의 제32보병연대가 주둔했다. 제7의무대대도 이 일대에 함께 주둔했던 것으로 보인다. 사진 속에 보이는 붉은 벽돌조의 건물은 현재 한미연합사에서 사용 중이다.

    * 장소 연혁: 일본군 제78연대 주둔지 > 미육군 제7보병사단 제32연대 주둔지 > 미8군사령부
    [서울기록원 기록건 CY0006]

  • #12 미육군 제7보병사단 제32연대

    제7의무대대에 배속된 신병 환영식, 1948-03-05

    제7의무대대에 배속된 신병 환영식, 1948-03-05
    1948년 3월 5일 용산미군기지 메인 포스트에 주둔하고 있던 미육군 제7보병사단 예하 제7의무대대 소속 코왈스키 소령이 전입 신병들을 환영하는 모습이다. 이곳은 일제강점기 일본군 제78보병연대가 주둔했던 곳이다. 해방 직후부터는 미육군 제7보병사단 예하의 제32보병연대가 주둔했다. 사진 속에 보이는 붉은 벽돌조의 건물은 현재도 그대로 남아있으며, 한미연합사에서 사용 중이다.

    * 장소 연혁: 일본군 제78연대 주둔지 > 미육군 제7보병사단 제32연대 주둔지 > 미8군사령부
    [서울기록원 기록건 CY0003]

  • #13 미육군 제7보병사단 제31연대

    제31보병연대 소방전을 검열 중인 소방서장, 1948-04-23

    제31보병연대 소방전을 검열 중인 소방서장, 1948-04-23
    1948년 4월 23일 제31보병연대에서 소방서장이 소방전을 검열 중인 모습이다. 일제강점기 때는 일본군 보병 제79연대 주둔지였다. 6·25전쟁 후 육군본부를 거쳐 현재는 용산 전쟁기념관이 들어섰으며 옛 모습과 흔적은 전혀 찾아볼 수 없다.

    * 장소 연혁: 일본군 제79연대 주둔지> 미육군 제7보병사단 제31연대 주둔지 > 대한민국 육군본부> 전쟁기념관
    [서울기록원 기록건 CY0009]

  • #14 미육군 제7보병사단 제31연대

    제31보병연대의 육군기념일 행사, 1948-04-06

    제31보병연대의 육군기념일 행사, 1948-04-06
    1948년 4월 6일 미31보병연대의 육군기념일 행사에서 미육군 제7보병사단장이 바탄전투 때 불타버린 전투 깃발을 달아 주는 장면이다. * 바탄전투(Battle of Bataan, 1942.1.2~5.6)는 일제가 태평양 전쟁기 필리핀을 점령하기 위해 벌인 전투다. 1942년 4월 일본군이 바탄 반도 점령 후 7만여 명의 연합군 포로들을 잡아 120㎞를 강제 이동시키면서 연합군 포로들을 희생시킨 사건이다. 일본은 필리핀을 수중에 넣고 이후 전쟁 수행기지 및 남태평양 침공을 위한 전진기지로 사용하였다.

    *장소 연혁: 일본군 제79연대 주둔지 > 미육군 제7보병사단 제31연대 주둔지 > 대한민국 육군본부> 전쟁기념관
    [서울기록원 기록건 CY0008]

  • #15 미육군 제7보병사단 제31연대

    제31보병연대 주둔지 입구, 1948-04-06

    제31보병연대 주둔지 입구, 1948-04-06
    1948년 4월 6일 육군기념일 행사에서 제31보병연대 주둔지 입구를 미육군 통신대가 촬영한 것이다. 이곳은 일제강점기 때는 일본군 보병 제79연대의 입구였다. 1955년 3월 대구에 있던 육군본부가 이곳으로 이전하였고, 1989년까지 대한민국 육군본부로 사용하였다. 현재는 용산 전쟁기념관이 들어섰으며, 옛 모습과 흔적은 거의 찾아볼 수 없다.

    * 장소 연혁: 일본군 제79연대 주둔지 > 미육군 제7보병사단 제31연대 주둔지 > 대한민국 육군본부> 전쟁기념관
    [서울기록원 기록건 CY0007]

용산헬기장 북쪽 항공사진, 1963-10-16 [서울기록원 기록건 CY0075]
이 사진은 1963년 10월 16일 현 용산구 이촌동에서 용산 미8군헬기장 북쪽을 바라보면 항공 촬영한 것으로 매우 희귀한 전경이다. 사진이 촬영된 1963년 당시 용산 미8군헬기장은 사진 가운데 경원선 철도 아래 부근에 위치했고(검정색 사각형), 현재는 이촌동 아파트 단지가 들어서 있다. 사진 상단 오른쪽의 산은 서울 남산이다. 남산 동봉에서 시작한 산줄기가 녹사평을 거쳐 용산미군기지의 둔지산을 이루고 있는 모습을 선명히 확인할 수 있다. 중앙의 경원선 철도 위는 1950년대 후반에 조성된 미8군 골프장이며, 그 왼쪽으로는 최근 임시개방한 용산공원 부지와 대통령실이 위치한 국방부 부지다.

안내사항

※항공사진에 표시된 주요 장소와 관련한 사진은 1945년 이후에 촬영되었다. 이 사진은 서울기록원이 2022년 소장기록물 정리·기술 사업을 통해 미국 국립문서기록관리청(NARA)에서 수집·발굴한 사진이다.

※용산미군기지는 3개 지역 메인 포스트(Main Post), 사우스 포스트(South Post), 캠프 코이너(Camp Coiner)로 구분되어 있다. 용산미군기지 북쪽에 있는 ‘메인 포스트’는 주한미군사령부, 한미연합사령부 등이 있고, 남쪽의 사우스 포스트에는 주거시설을 비롯한 병원 및 편의 시설 등이 있다.

[용산기지 사우스포스트]최상위 지도
  • #01 미육군 제7보병사단 제31연대

    장엄미사를 위해 이동 중인 미육군 제7보병사단 사령부 사제들과 부대원들, 1948-06-27

    장엄미사를 위해 이동 중인 미육군 제7보병사단 사령부 사제들과 부대원들, 1948-06-27
    1948년 6월 27일 장엄미사를 위해 이동 중인 미육군 제7보병사단 사령부 사제들과 부대원들 모습이다. 사제들 너머 보이는 건물은 1940년대 일제가 정보작전센터를 구축하기 위해 만든 벙커로, 1940년 방위성 설계도면에는 '조선군사령부 제2청사'로 표기되어 있다. 조선군사령부 제2청사는 광복 후 미육군 제7보병사단이 용산기지로 진주하면서 '미육군 제7보병사단 벙커'로 사용되다가 주한미군 철수 직후 '대한민국 육군본부 벙커'로 재사용되었다. 현재는 한미연합사가 사용 중이며 '사우스 포스트 벙커(South Post Bunker)'로 부르고 있다.

    * 장소 연혁: 일본군 제79연대 주둔지 > 미육군 제7보병사단 제31연대 주둔지 > 대한민국 육군본부 > 사우스 포스트 벙커
    [서울기록원 기록건 CY0014]

  • #02 미육군 제7보병사단 모래시계 클럽

    미육군 제7보병사단 모래시계 클럽, 1948-10-05

    미육군 제7보병사단 모래시계 클럽, 1948-10-05
    1948년 10월 5일 미육군 제7보병사단 모래시계 클럽 전경이다. 이 클럽은 일제강점기에는 일본군들의 장교클럽인 ‘해행사(偕行社)’였다. 해행사는 일본군을 위한 각종 행사가 개최된 곳으로, 일제 말 학도병들의 전형검사장으로 사용되기도 하였다. 광복 직후 일본군이 물러나고 미군이 진주하면서, 일본군 장교클럽에서 미군 클럽으로 용도가 바뀌었다. 미육군 제7보병사단 모래시계 클럽은 6·25전쟁 때 폭격으로 파괴되었다. 한편 1952년 11월 미8군이 전화(戰火)를 입은 용산기지를 재건할 때, 부산 임시수도에 있던 대한민국 국방부가 이 구역으로 이전하려다 무산되기도 했다. 현재 이곳에는 용산기지 미육군 커뮤니티 서비스 센터(Army Community Center)가 들어서 있다.
    [서울기록원 기록건 CY0033]

  • #03 미육군 제7보병사단 미국인학교

    미육군 제7보병사단 미국인학교의 가을학기 개학, 1948-09-07

    미육군 제7보병사단 미국인학교의 가을학기 개학, 1948-09-07
    1948년 9월 7일 용산기지 내 미육군 제7보병사단 미국인학교의 가을학기 개학 때 모습이다. 일제강점기에는 일본군 제20사단 사령부 청사로 쓰였다. 광복 이후 미육군 제7보병사단이 주둔하면서, 미국인학교로 용도를 변경해 사용했다. 이 건물은 6·25전쟁 당시 폭격으로 파괴되었는데, 이후 미8군이 주둔하면서 이곳에 사우스 포스트 예배당(chapel)이 들어섰다.
    [서울기록원 기록건 CY0018]

  • #04 미육군 제7보병사단 시설공병대

    공중에서 본 미시설공병대 전경, 1948-09-24

    공중에서 본 미시설공병대 전경, 1948-09-24
    서빙고 캠프의 미육군 제7보병사단 시설공병대 전경이다. 일제강점기에는 일본군 육군창고 부속 건초창고 및 무선전신소가 있던 지역이었다. 사진을 자세히 보면 이 일대의 일제식 건물들을 재활용해 미시설 공병대가 그대로 자리를 잡았음을 알 수 있다. 중앙 상단의 가로 일자형 건물 지붕에 ‘POST ENGINEER(시설 공병대)'라고 적혀있다. 사진 하단에 보이는 철로는 용산에서 원산까지 가는 '경원선 철로’이다.
    [서울기록원 기록건 CY0029]

  • #05 미육군 제7보병사단 통신 및 시설공병대

    공중에서 본 미육군 제7보병사단 통신·시설공병대, 1948-09-24

    공중에서 본 미육군 제7보병사단 통신·시설공병대, 1948-09-24
    1948년 9월 24일 주한미군이 용산기지에 주둔하고 있던 미육군 제7보병사단 통신 및 시설공병대 일대를 항공 촬영한 사진이다. 사진 중앙을 보면 반원형의 퀀셋 건물들이 세로로 줄지어 들어서 있다. 이것이 미육군 제7보병사단 통신중대이고, 그 좌측 너머로 시설공병대가 들어서 있다. 그리고 반원형 퀀셋 건물 오른편 수풀 사이의 큰 건물은 미육군 제7보병사단 위관장교 기숙사로, 일제강점기 때에는 용산총독관저였다. 그 너머로는 한강이 보인다.
    [서울기록원 기록건 CY0027]

  • #06 미육군 제7보병사단사령부

    미육군 제7보병사단사령부를 방문한 조선국방경비대, 1948-08-26

    미육군 제7보병사단사령부를 방문한 조선국방경비대, 1948-08-26
    1948년 8월 26일 조선경비대 사령관 송호성 장군과 참모들이 용산기지의 미육군 제7보병사단 사령부를 방문하여 미군들과 함께 촬영한 사진이다. 이 시기는 대한민국 정부가 수립됨에 따라 조선경비대는 육군으로, 조선해안경비대는 해군으로 개편되어 이제 막 대한민국 국군으로 면모를 갖추려는 무렵이었다. 맨 좌측 뒤쪽에 서있는 사람은 임시군사고문단(PMAG) 참모장 라이트 대령이다. 왼쪽 앞줄부터 로버츠 임시군사고문단장, 조선경비대 사령관 송호성 준장, 미육군 제7보병사단장 피번 준장, 미육군 제7보병사단 참모장 헌터 대령, 조선경비대 참모부장 정일권, 그리고 그 뒤로 조선경비대 정보국장 백선엽이 보인다.
    [서울기록원 기록건 CY0016]

  • #07 미8군 메인 PX

    용산기지 미8군 지원사령부 메인PX, 1964-01-27

    용산기지 미8군 지원사령부 메인PX, 1964-01-27
    1964년 1월 27일 용산기지 내 미8군 메인 매점(PX) 전경이다. 사진에 보이는 메인 매점(PX)은 1970년 7월 전쟁기념관 북쪽에 메인 PX를 새롭게 신축하면서 도서관으로 용도가 바뀌었다. 얼마 전까지 도서관으로 사용되다가 현재는 용산기지가 평택으로 이전하면서 빈 건물로 남아있다.
    [서울기록원 기록건 CY0080]

  • #08 미8군 메인 도서관

    용산기지 메인도서관, 1948-01-27

    용산기지 메인도서관, 1948-01-27
    1964년 1월 27일 용산기지의 메인 도서관 전경이다.이 곳은 현재 한미연합사가 위치한 메인 포스트다. 사진에 보이는 도서관 건물은 현재 미군 사무실로 사용 중이다. 메인 도서관은 1970년 7월 전쟁기념관 북쪽에 메인 PX를 새롭게 신축할 당시 옛 PX 건물로 이전하였다. 현재 메인 도서관은 용산기지의 평택 이전사업으로 도서관으로 사용하지 않고 빈 채로 남아있다.
    [서울기록원 기록건 CY0081]

  • #09 사우스 포스트 장교식당(미8군 장교클럽)

    용산기지 사우스 포스트 장교식당, 1964-01-04

    용산기지 사우스 포스트 장교식당, 1964-01-04
    1964년 1월 27일 용산기지 사우스 포스트 장교식당의 정면 모습이다. 뒷면의 설명에는 장교식당으로 나오지만, 이 건물은 1958년 건축되어 줄곧 미8군 장교클럽으로 사용되었다. 1960~70년대를 대표한 많은 한국 가수들이 이곳에서 공연하였고 '한국 대중문화의 요람'으로 불리던 곳이다. 얼마 전까지 주한미군 용산지원센터로 사용되다가, 주한미군 평택 이전사업에 따라 현재는 비어있다.
    [서울기록원 기록건 CY0079]

  • #10 용산기지 사우스 포스트 야구장

    미군위문협회(USO)죠니 그랜트 연예단 공연 모습, 1955-05-23

    미군위문협회(USO)죠니 그랜트 연예단 공연 모습, 1955-05-23
    1955년 5월 23일 미군위문협회(United Service Organizations) 죠니 그랜드 연예단의 한 멤버가 미8군장병들을 앞에서 위문 공연하는 모습이다. USO는 미군과 미군 가족들을 위한 군 장병 복지기관으로, 편의 시설 운영과 위문공연을 맡았다. USO 본부는 6·25전쟁 이후 처음에는 서울역 앞 동자동에 위치했다가 1970년대 캠프킴(Camp Kim)으로 이전했다. 사진 뒷면의 설명에 따르면 약 2천여 명의 장병들이 모였다고 한다. 공연 장소는 현 용산미군기지 사우스 포스트이다.
    [서울기록원 기록건 CY0061]

  • #11 미육군 제7보병사단 연병장

    미육군 제7보병사단 연대 사열, 1948-10-11

    미육군 제7보병사단 연대 사열, 1948-10-11
    1948년 10월 11일 미육군 제7보병사단 공동묘지 언덕(cemetery hill)에서 제31보병연대 사열 간 도열 중인 M18 전차들의 모습이다. 공동묘지 언덕은 일제강점기 이태원 공동묘지로 가는 방향에 있는, 지금의 둔지산 일대 언덕을 말한다. 오늘날 용산미군기지와 국립중앙박물관 부근이다. 장병들 너머 왼쪽에 보이는 작은 둔덕이 둔지산(현 용산미군기지)이며, 그 아래 왼쪽에서 오른쪽으로 일직선으로 이어지는 긴 도로는 현 미10군단(Ⅹ Corps) 도로다. 이 시기 미육군 제7보병사단은 이 도로를 '공동묘지 도로(cemetery road)'라고 불렀다.

    * 장소 연혁: 용산연병장> 미육군 제7보병사단 연병장> 미8군골프장
    [서울기록원 기록건 CY0035]

  • #12 미육군 제7보병사단 구금소

    공중에서 본 미육군 제7보병사단 구금소 전경, 1948-09-24

    공중에서 본 미육군 제7보병사단 구금소 전경, 1948-09-24
    1948년 9월 24일 주한미군이 미육군 제7보병사단 구금소 일대를 항공 촬영한 장면이다. 현재 용산기지 내 둔지산 일대이다.사진이 촬영된 시점인 1948년 9월경에는 미육군 제7보병사단 헌병소대가 머무르며 미육군 제7보병사단 구금소를 운영·관리했다. 일제강점기에는 일본군들을 수감했던 군사감옥인 '용산위수감옥'이었다. 1909년에 건축된 붉은 벽돌조 건물로, 한때 강원도와 경기도에서 큰 활약을 했던 의병장 강기동이 수감된 바 있다. 1947년에 대한민주청년동맹사건이 발생했는데, 미군정 재판에 따라 김두한 등이 사형을 선고받고 이곳에 수감된 일도 있다. 이듬해인 1948년 4월 장덕수 암살사건 피의자 박광옥, 배희범 등 10명이 수감되었고, 그 이듬해인 1949년에는 백범 김구 암살범 안두희(당시 육군 포병 소위)도 수감되었다. 얼마 전까지 주한미군 의무부대가 주둔해 의무부대 사무실로 활용하다가 평택으로 이전했다.

    * 장소 연혁: 용산위수감옥 > 용산위수형무소 > 미육군 제7보병사단 구금소 > 육군형무소 > 미군 의무부
    [서울기록원 기록건 CY0030]

  • #13 사우스 포스트 #5090

    용산기지 사우스 포스트 내 사용불능 건물#5090, 1954-07-17

    용산기지 사우스 포스트 내 사용불능 건물#5090, 1954-07-17
    1954년 7월 17일 용산기지 사우스 포스트 내 사용불능 건물 #5090 모습이다. 이 건물은 용산총독관저로 6·25전쟁 시기 폭격으로 심각한 피해를 받았다. 용산총독관저는 1959년경 주한미군 병원이 들어서며 철거되었다. 얼마 전까지 미121병원이 이곳에 있다가 주한미군 평택 이전사업에 따라 평택 캠프 험프리에 미121병원이 신축 개원하면서 현재는 빈 건물로 남아있다. 과거 용산총독관저의 흔적은 남아있지 않으나, 인근에 용산총독관저와 조선군사령부를 연결했던 지하방공호가 현재 그대로 남아있다.

    * 장소 연혁: 용산총독관저 > 사우스 포스트 #5090 > 121병원
    [서울기록원 기록건 CY0051]

  • #14 사우스 포스트 #4046

    용산기지 사우스 포스트 내 사용불능 건물#4046, 1954-07-17

    용산기지 사우스 포스트 내 사용불능 건물#4046, 1954-07-17
    1954년 7월 17일 용산미군기지 사우스 포스트 내 사용불능 건물 #4046 모습이다. 이 건물은 일제강점기에는 조선군사령관 관저였고, 6·25전쟁 시기 폭격으로 심각한 피해를 받았다. 현재 이 일대에는 주한미군의 드래곤힐 호텔이 들어섰는데, 조선군사령관 관저 앞에 있던 초소와 석물이 호텔 입구 장식물로 쓰이고 있다.

    * 장소 연혁: 조선군사령관 관저 > 사우스 포스트 #4046
    [서울기록원 기록건 CY005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