결핵은 한국사에서 여러 강력한 전염병 중에서도 사망률 1·2위를 기록했던 질병이다.
결핵은 호흡기 분비물로 옮겨지는 전염성 질환으로, 가족간 감염이 다수를 이루었다.
일제강점기 말기에는 감염자가 40만 명에 이르렀고, 결핵 치료는 주로 결핵 요양소 건설과 건강삼당소 확장 혹은 예방법 홍보에 집중되었으나 매년 5만 여명이 결핵으로 사망할 정도로 제대로 된 치료 또한 어려운 실정이었다.
해방 이후 결핵은 ‘국민병’ 또는 ‘망국병’이라고 불릴 정도였기에 1946년 4월 미군정청 보건후생부는 ‘전쟁 후에 의례희 격증하는 결핵과 전염병 예방’ 을 위해 마산에 국립결핵원을 개설하여 결핵 환자를 치료하였다.
서울의 결핵관리는 미군이 서울시에 들어온 바로 다음 날인 1945년 9월 8일 자로 경성부 행정기구가 재건되면서 후생부 산하에서 이루어졌다.
이어 미군정 보건후생국은 주로 급성전염병환자를 취급하던 시립순화병원을 결핵진료병원으로 전환하였고, 서울시립학교보건소를 설치하는 등 검진 및 예방에 집중된 정책을 펼쳤다.
정부 수립 직후인 1948년 12월 29일 서울시 훈령 제1호를 통해 서울시 기구가 공포되면서 서울의 공중보건 관련 업무는 사회국에서 다루어지게 되었다.
6·25 전쟁 이전 서울의 공중보건 특히 결핵예방사업은 유니세프(UNICEF)가 원조의 주체였다.
유니세프의 계획에 따라 1950년 서울 시내 만 19세 이하의 전체 청소년 60만 명을 대상으로 BCG1) 예방접종을 계획하였다.
그러나 6·25 전쟁으로 인하여 이러한 계획은 차질을 겪게 되었고 결핵환자는 다시 급증했다.
1954년 정부 추산에 따르면 인구 2,000만 명 중 약 130만 명이 활동성 결핵환자였고, 결핵 사망률은 10만 명 당 300~400명에 이를 정도였다.2)
사의원 드려 후생보건의 신계획 / 고아, 양로원을 확충 / 수원, 마산에 국립결핵병원을 건설
동아일보. 1946-04-22/한국사데이터베이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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¹ bacille de Calmette-Guerin vaccin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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² 대한감염학회, 『한국전염병사』 2, 군자출판사, 2018, p.59.
6·25 전쟁은 광복 이후 결핵이 전염되는 것에 기름을 부은 격이 되었다.
열악한 영양 상태, 피난에 따른 집단생활, 의료 접근성 약화는 결핵 감염률과 활동성 결핵 유병률을 증가시켰다.
1954년에 이르러서는 폐결핵 사망자가 한 달에 1만 명에 이를 정도였다. 이에 반해 국가 차원의 입원환자는 2,000명, 통원 치료 중인 사람도 3만여 명에 불과하였다.
전쟁 직후인 1954년 「전염병예방법」이 공포되면서 결핵은 제3종 전염병으로 규정되었다.
이 법에 따라 의사는 결핵 환자에 관한 기록과 신고 의무를 지니게 되었고, 30세 미만자가 매년 1회 이상 결핵검진을 받을 것과 BCG 예방접종이 의무화되었다.
또한 시·읍·면장은 결핵 예방상 필요한 요양소나 진료소를 설치할 수 있도록 했으며, 특별시나 시·읍·면은 요양소나 진료소에 대한 경비를 부담하게 하였고, 그 경비를 환자나 보호자로부터 징수할 수 있도록 하는 등 국가의 결핵관리 정책의 변화가 시작되었다.
다만 BCG 예방접종이 법으로 규정되었으나 그 보급이 일반화되지는 못했으며, 검진 자체도 엑스선 검사 장비의 부족으로 주로 객담 검사 등에 의존해야 하는 등 정책과 현실의 괴리는 존재하였다.
민간에서의 결핵 예방사업은 보건부와 1953년 설립된 ’대한결핵협회‘가 함께했다. 이 과정에서 1953년 중구 회현동에 공증보건원이 설립되었는 이 단체는 국가결핵관리를 위해 국립중앙결핵원 개원을 지원하기도 하였다.
한편 대한결핵협회가 설립된 이후 결핵 퇴치를 위한 범국민 모금운동인 ’크리스마스 씰‘ 모금운동 또한 민간에서 전개되었다.1)
이 시기 서울시의 경우 보건사회부 방역과의 지휘 아래 서울특별시 사회국 산하의 의약과와 위생과가 결핵 환자 관리를 담당하였다.
서울시의 결핵관리사업 역시 정부의 예방 사업에 준하는 형태로 진행되었으며, 서울시내 전 보건의료기관이 동원되어 결핵예방주간 선포, 결핵 예방 및 접종 사업을 실시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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¹ 우리나라에서는 1932년 12월 캐나다의 선교의사인 셔우드 홀(Sherwood Hall)에 의해 크리스마스 씰 모금운동이 처음 시작되었다.
셔우드 홀이 우리나라에서 크리스마스 씰을 발행하게 된 동기는 [첫째] 한국사람들에게 결핵을 올바르게 인식시키고, [둘째] 만인을 항결핵 운동에 참여시키는 것, [셋째] 재정적 뒷받침을 필요로 하는 결핵퇴치사업의 기금을 모으기 위함이었다.
1932년 이후 1940년까지 모두 9차례에 걸쳐 크리스마스 씰이 발행되었으나, 태평양전쟁 발발 직전 셔우드 홀은 일제에 의해 누명을 쓰고 강제로 추방됨에 따라 크리스마스 씰 발행 역시 중단되었다.
[출처 : https://loveseal.knta.or.kr/christmas/business_introduce.html]
무료 가두진료 등 보건부 『결핵예방주간』 제정 / 동아일보. 1954-12-10(한국사데이터베이스)
서울시청 크리스마스 씰 구입, 1959-11-04 / IT3202
BCG접종반 편성, 결핵예방접종, 1965-03-27 / IT8889
1954년 보건부에서는 심화된 결핵 문제에 대처하기 위하여 ‘결핵 대책 5개년 계획’을 수립하였으며, 결핵 지식의 보급, 전문 요원 훈련, BCG 접종, 통원 치료 제도를 확립하였다.
그러나 이러한 정책은 전후의 상황을 고려하더라도 실질적인 효과를 나타내기에는 한계가 있었기에, 외원 단체 중심의 결핵 사업이 추진되는 실정이었다.
결핵 예방 사업이 본격적으로 추진된 시점은 1961년 「보건소법」이 제정되면서부터이다.
「보건소법」은 1962년 전면 개정되면서 “Health-Net”라는 보건의료 조직망을 구축하게 된다.
그 결과 결핵관리는 BCG 접종 사업, 결핵 환자 등록 및 치료 등 결핵 관리 사업이 전환되었고, 9개 시도에 결핵 검사소가 설치되고, 시범결핵관리소 사업 등을 진행하는 등 결핵 예방 사업이 확장되었다.
서울의 경우에도 국립의료원과 연관이 있는 중구보건소 내에 결핵관리소가 설치되었다.
이러한 정책 전환에 따라 1964년 말에 이르러서 전국적으로 보건소에 등록된 결핵 환자 수가 10만 명을 넘어 이후 보건소가 결핵 관리를 주도하게 되었다.
민간에서는 1970년 대한결핵협회가 결핵연구원을 설립하면서 결핵 예방 사업을 추진하였으며, 1970~80년대 이르러서의 결핵 관리 정책들(환자 등록 및 치료, 집단 검진, BCG 접종, 결핵 실태 조사 등)은 보건소를 중심으로 정착되었다.
특히 치료 효과를 증대시키기 위해 보건소를 중심으로 표준 처방전을 만들고 처방의 적절성을 향상시키는 사업도 실시되었다.
시범결핵관리소설치운영을위한협정체결의건, 생산기관 : 총무처 의정국 의사과, 생산연도 : 1961/BA0084274, 국가기록원
서울시청 크리스마스 씰 구입, 1959-11-04 / IT3202
시범결핵관리소시무식, 생산기관 : 공보처 홍보국 사진담당관, 생산연도 : 1961/ CET0069756, 국가기록원
신임 윤치영 서울시장, 결핵요양원 시찰, 1964-01-07 / IT9380
결핵 진료반 무료진단 개시, 1967-03-10 /
IT8918 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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¹ 대한결핵협회 서울시지부에서 구성한 결핵 무료진료반 업무 시작에 앞서, 김현옥 서울시장과 관계자들이 점검했다
결핵관리의 성과에는 보건소의 역할이 있었다.
우리나라 보건소는 1945년 미 군정법령 제1호(위생국의 설치에 관한 건)에 기반하여 1946년 9월 서울에 모범보건소가 설치된 것을 시발점으로 보고 있다.
1) 보건소는 각종 전염병 예방을 담당하는 기관으로, 특히 결핵관리에서 진단과 치료를 담당하는 기관이었다.
그러나 1947년까지 경상남도, 전라북도를 포함해 전국에 보건소는 3곳만 존재했을 뿐이었다.
보건소는 1954년 WHO와 국제연합한국재건단(UNKRA)지원으로 보건진료소 활성화 프로그램이 시작되고, 1956년 약 370여 개 보건소가 농촌과 중소도시에 설치되면서 확대되었다.
이에 반해 서울의 경우 1952년 6개의 보건소와 23개의 보건진료소가 있었으나 이듬해부터 차츰 줄어들어 1959년 각 구당 1개소씩 9개로 정리되었다.2)
1962년 보건소법의 전면 개정으로 보건소의 역할이 확대되어 전염병의 예방과 질병의 치료 특히 결핵관리 또한 보건소의 역할이 되었다.
그 결과 1963년 3월부터 서울시 보건소는 시의 보건업무를 전담하게 되는데, 그동안 경찰, 서울시, 각 구청 사회과에서 각각 분할하여 취급하던 업무를 보건소에서 일괄로 담당하도록 하였다.
또한 1962년 개정된 「보건소법」에 따라 구축된 보건의료 조직망은 전국 189개 보건소와 670개 공의진료소, 59개 지정 진료소를 설립하게 하였고, 그 결과 전국적으로 결핵 환자 치료를 가능하게 하였다.
보건소 체계가 구축되면서 1962년부터 정부는 보건소망을 통해 국가 결핵 관리 사업을 시작했다.
우선 결핵환자 10만 등록사업 등의 추진을 위하여 전국 182개 보건소에 결핵관리요원을 1명씩 배치하고, 대한결핵협회 내에 중앙 결핵검사소 또한 설치하였다.
그리고 민간에서는 1963년부터 대한결핵협회는 결핵관리의사를 훈련시켜 시도마다 1명씩 배치하고, 9개 시도지부에 결핵검사소를 설치하였으며, 1968년에는 「결핵예방법」이 제정되어 결핵 전문 인력 확보를 위한 결핵전문의제도가 실시되었다.
이 시기 서울시의 결핵 관리 사업은 보건사회국 산하에는 42개 사업장(보건소)을 중심으로 이루어졌으며, 종로보건소, 중구보건소, 서대문보건소, 용산보건소 등과 교육국 산하의 학교보건소가 결핵관리에 함께했다.
이후 서울시는 보건소를 통하여 결핵환자 엑스선 검사, 학생 BCG 접종을 강화하고 통계를 관리하는 등 보건소 중심의 결핵예방 정책을 수행하였다.
그러나 이러한 제도와 조직 정비에도 불구하고 지역 보건소 단위 결핵환자 등록 및 치료사업은 엑스선 촬영기의 부재, 환자 등록의 어려움, 인력 부족, 높은 치료 비용, 의료 인력의 부족 등으로 계획대로 흘러가지는 않아 1960년대까지 획기적으로 결핵환자를 줄이지는 못했다.
서울특별시립보건소설치조례제정의건(제88호) / 생산기관 : 서울특별시 기획관리실 법무담당관 생산연도 : 1954 / BA0089255, 국가기록원
결핵관리요원채용, 1970 / IT868608
결핵 진료반 무료진단 개시, 1967-03-10 / IT8918 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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¹ 미군정기 설치된 모범보건소는 1958년 국립중앙보건소로 이름을 바꾸면서 결핵 예방 기능을 확장하였다.
한편 1958년 보건사회부에 의해 결핵요양기관으로 지정되어 구호결핵약품을 배정받는 기관은 66개소 였으며, 이들 병원 중 서울시립순화병원(이후 서울시립중부병원), 이화여대부속 신촌결핵병원,
서울시립아동병원 한노분원(1963년 시립마포병원, 1973년 서울시립서대문병원에 통합)은 결핵 담당 병원의 역할을 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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² 종로구, 중구, 동대문구, 성동구, 성북구, 서대문구, 마포구, 용산구, 영등포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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³ 대한결핵협회 서울시지부에서 구성한 결핵 무료진료반 업무 시작에 앞서, 김현옥 서울시장과 관계자들이 점검했다.
1970년대 새마을운동이 시작되고, 경제개발 정책이 활발히 진행되면서 보건의료 분야에 대한 관심도 증폭되었다.
1970년 정부는 만성 전염병인 결핵 예방 대책의 방향을 전환하여 국가 및 정부 중심으로 결핵 예방을 펼쳐오던 것에서, 가정을 중심으로 예방 대책을 펼치자는 결핵 예방 대책을 제시하였다.1)
또한 1971년을 계기로 전염병 방역 대책이 사후 방역이 아닌 사전 방역으로, 국지 방역이 전면 방역으로, 일시 방역이 연중 방역으로 전환되면서 지속적인 예방과 방역이 가능한 체제가 마련되었다.
이 시기 보건사회부는 결핵을 10대 사망 질병에서 제외시키기 위하여 1980년까지 결핵으로 인한 사망률을 인구 10만 명당 10명 이내로 감소시키고, 전염성 환자를 1천 명당 1명 이하로 낮출 계획도 세웠다.
2) 이러한 계획을 바탕으로 결핵 환자 관리 사업의 효율성을 증진하기 위하여 보건소 및 보건지소에서만 결핵환자를 등록 치료하던 제도를 민간 병의원까지 확대하고, 치료비의 일부를 국가가 부담하도록 하였다.
또한 예방접종 및 엑스레이 검진을 확대 실시하고, 결핵관리요원의 전문성 확보 및 검진 시설 보강, 의료보험 제도 도입 등을 통하여 1980년대 후반 결핵 관리에 일정 성공하여 급격하게 환자수가 줄어들게 되었다.
1990년대 이후에는 결핵 예방 정책과 보건위생의 개선으로 결핵 환자는 꾸준히 감소하였다.
서울시의 경우 25개 자치구 별로 지역사회의 BCG예방접종 및 결핵환자 발견사업과 등록치료, 환자 중도 탈락 방지를 위한 환자교육과 추적조사(Follow-up)에 역점에 두었다.
3) 이러한 노력의 결과 2010년대 이후 결핵 환자는 10만 명당 60여명 정도까지 감소하였다.
결핵관리 정책의 변화와 더불어 서울에 전문 결핵 치료 병원 등이 설립된 1960년대 이후 치료 병원 주변으로 결핵 환자들이 거주하는 결핵 환자촌이 생성되었다.
특히 결핵 치료 전문인 시립서대문병원(순화병원)이 자리잡은 이후 은평구 구산동 일대의 개발제한구역 주변으로 결핵 환자들이 모여들어 마을을 형성하였다.
1970년대 말에는 약 1천 5백여 명이 살 정도로 규모가 컸으나, 서울시에서는 주변 주민들의 민원과 도시개발을 위하여 1980년부터 결핵 환자촌 처리를 위한 논의를 시작하였고 2009년 재개발을 통해 사라지게 되었다.
결핵환자촌처리방안에따른연석회의개최, 1981 / IT141877
은평구 구산동(결핵인 마을)주거환경개선 추진관련 협조요청, 2002-04-17 / IT191204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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¹ 결핵예방은 가정에서, 경향신문, 1970. 11. 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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² 방역,, 안전한가, 경향신문, 1973. 4.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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³ 김용세, 「서울시 결핵관리현황」, 『보건세계』, 1998.