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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 도시의 확장과 국민주택의 건설

서울의 토지구획정리사업

토지구획정리사업은 1934년 6월 20일 「조선시가지계획령」의 제정으로 처음 도입되었으며, 전국 각 도시에서 시행되었다. 「조선시가지계획령」은 1948년 대한민국정부 수립과 더불어 ‘시가지계획령’으로서 존속되다가 1962년 「도시계획법」과 「건축법」이 제정되면서 비로소 폐지되었다. 특히 「도시계획법」을 제정하면서 토지구획정리에 대한 정의, 사업대상지, 시행절차, 환지, 청산업무 등을 규정하였으며, 기타 미비한 사항은 「농지개량에 관한 법령」을 준용하게 하였다. 그러나 토지구획정리사업을 시행할 때 「도시계획법」과 「농지개량에 관한 법률」을 각각 적용함으로써 혼선을 초래할 우려가 있어, 1966년 토지구획정리사업을 위한 단독법으로서 「토지구획정리사업법」이 제정되었다. 이 시기 서울의 전후 재건과 더불어 과밀 도시의 해소, 열악한 주거시설을 극복하기 위하여 주택과 기반시설 건설이 요구되었다.

1950~60년대 토지구획정리사업은 주택 분야에서 단독주택을 건축하는 것을 중심으로 진행되었으며, 도시계획에 맞추어 토지를 개발하는 사업인 토지구획정리사업은 1980년 「택지개발촉진법」 제정 이후 변경되었다. 서울시의 경우 1984년까지 토지구획정리사업으로 총 93㎢에 달하는 주거용지와 41㎢에 달하는 공공용지가 개발되었는데, 이는 서울시 기존 개발면적의 약 35%에 달하는 큰 비중을 차지하였다.

[2000년대를 향한 서울시도시기본계획 (1990)] 대지역구분도

도시계획사업중앙토지구획정리
시행규칙공포의건(제18호)_1952

[2011년 서울도시기본계획 (1997)] 대지역구분도

도시계획사업중앙토지구획정리시행에관한
시가지계획령시행규칙140조에의한고시의건, 1952_IT852435

서울의 주택

재건주택1) 이른바 ‘후생주택’으로 불리던 단독주택은 1953년 9월부터 대한주택영단을 통해 전국적으로 건설되었다. 재건주택은 건평 9평으로 방 두 칸, 마루 한 칸, 부엌 한 칸으로 구성되었다. 서울에서 지어진 재건주택은 ‘서울시에 6·25 전쟁에 주택을 소유하고 거주한 자로서, 6·25로 인하여 주택이 전소, 전파되어 현재 주택이 없는자’에게 1순위 입주 자격을 부여하였다. 1959년 말까지 대한주택영단은 서울에 모두 1,553호의 재건주택을 분양하였으며, 정릉동, 안암동, 대현동, 휘경동, 신길동, 회기동, 답십리, 불광동, 이문동, 대저동, 월곡동 등 서울의 외곽지역의 땅값이 저렴한 곳을 골라 집중적으로 공급하였다.

대한주택영단은2) 1950년대 후반 국민주택을 중심으로 “보다 더 좋은 집을, 보다 더 싸게, 보다 더 많이” 짓는다는 것을 기본원칙으로3) 제1차 국민주택 건설사업을 실시하면서, 서민을 위한 주택 공급에 집중하였다. 이를 기반으로 1954년 4월에 착공하여 1959년 6월 준공된 불광동 국민주택은 서울의 대표적인 국민주택지로 ‘평화촌’이라는 별칭으로 불리기도 했다. 특히 1950년대의 후생주택을 새롭게 개량한 것이어서 호평이 많았으며, 이후 북가좌동, 상도동, 흑석동, 회기동, 홍제동 등과 김포 일대에 국민주택이 속속 지어졌다.

서울시는 대한주택영단보다 앞서 부흥주택공급에 나섰다. 1955년 12월 16일 50호가 준공된 청량리 부흥주택지는 서울시가 사업 시행자가 되어 육군 제1201 건설공병대가 시공하였고, 2호 연립 2층 주택으로 지어져 한 동에 4세대가 거주할 수 있었다. 청량리의 2층형 연립주택 단지는 1층 단독주택 위주였던 공영주택 단지가 공동주택단지로 변해가는 과도기적 모습으로 이해할 수 있다.

1960년대 한국 주택공급시스템은 민간을 중심으로 이루어졌다. 제3차 경제개발 5개년 계획 이후부터 정부의 주택투자자금이 증가하고, 양적인 주택건설을 촉진하기 위한 제도가 정비되면서, 1970년대 중반 이후부터 공공의 공급이 증가하기 시작하였다. 특히 1963년 「공영주택법」의 제정으로 인해 국가차원에서 주택문제를 해결하기 위한 법적 근거가 마련되어 공영주택의 공급이 확대되는 기반이 마련되었다. 서울에서 국민주택의 전례없는 대량공급이 이뤄진 지역은 1966년 5월에 착공하여 10월에 일부 완공한 화곡단지이다. 이는 시범주택의 성격도 갖는 것이어서, 근대적인 표준주택단지에 따르는 어린이놀이터, 공원 등 각종 복지후생시설과 학교, 소방서, 시장 등 일반 공공시설을 갖추어 근대 전원주택가로서의 면모를 갖추었다.

[2000년대를 향한 서울시도시기본계획 (1990)] 대지역구분도

불광동후생주택전경1_1960

[2011년 서울도시기본계획 (1997)] 대지역구분도

1959년 영등포 주택 건설현장, 1959-10-01 / IT453

  • ¹ 재건주택은 1954년에 이르러 정부계획에 의하여 ‘UNKRA(유엔한국재건단)’가 원조한 자금으로 건설·관리되는 주택을 통칭한다. 여기에 융자금이 포함되고 그 융자금이 국채발행 기금이거나 귀속재산처리적립금 중 주택금융자금이라면 국민주택이라고 하였으며, 이 둘을 합한 것을 국민재건주택이라과 하였다. 후생주택은 무주택자이거나 서민일 경우, 사회사업의 일종으로 주택을 제공했다는 의미를 더한 것이다. (박철수, 『한국주택 유전자』1, 도서출판 마티, 2021, p.491.)
  • ² 1941년 창립된 조선주택영단(朝鮮住宅營團)을 모태로 하여 1948년 정부수립과 함께 ‘대한주택영단’으로 개칭되었고, 1962년 공포된 대한주택공사법(법률 3841호)에 의거하여 대한주택공사로 발족하였다.
  • ³ 김윤기, 1959. 『주택』제1호, 「창간사」, 대한주택영단, p.10,
[2000년대를 향한 서울시도시기본계획 (1990)] 대지역구분도

국유임야내후생주택건축에관한건, 1955 ~ 1956 / IT1047669

[2011년 서울도시기본계획 (1997)] 대지역구분도

1960년도국민주택건설, 1961 / IT859972

단지형 아파트와 도심 상가아파트

서울에 본격적으로 아파트가 건설되기 시작한 것은 대한주택공사가 설립된 1962년 이후부터이다. 1962년 대한주택공사의 마포아파트 단지 건설로 본격화된 공동주택 개발은 도시 근로가구의 주택 부족 문제 해결과 도시개발을 위한 유력한 방안으로 시작되었다. 이 시기 서울은 창신아파트, 정동아파트, 이화동아파트, 홍제아파트, 돈암아파트 등이 지어졌다. 그러나 1960년대 아파트는 인기가 없었으며, 단독주택이 전체 주택의 95.3%를 차지하고 있을 정도로 아파트 공급도 부족하였다. 이런 상황에서 마포아파트 단지는 주거지를 고층화하려는 최초의 시도였으며, 한국 최초의 단지형 아파트로 불린다. 1) 마포아파트 단지는 제1차 경제개발 5개년 계획의 주택사업 일부로서 책정된 것으로, 상당한 의욕을 가지고 중산층을 위한 주택을 공급하고자 추진하였다. 이후 본격적인 고층 주거형식은 1960년대 후반에 나타나기 시작한다.

1967년 서울특별시 시정 방침 중 하나로 ‘민간자본 유치를 통한 상가아파트 건립’이 공표되고,2) ‘밤낮을 가리지 말고, 시민의 일꾼이 되는 태세부터 갖추라’는 김현옥 서울특별시장의 특별지시1호로 발표된다. 김현옥 시장의 시정방침은 세운상가와 파고다 아케이드 및 낙원상가 등 도심재개발사업 추진, 한강개발사업과 남산터널 개통, 400여 동의 서울시민아파트 건설 등으로 ‘상가아파트’라는 새로운 도시건축 유형을 낳은 배경이 되었다.

서울 최초의 상가주택 건설구역은 ‘갈월동-세종로, 시청-을지로6가, 세종로-동대문, 남대문-한국은행-화신 앞’의 서울 시내 중요 간선도로변으로 1958년 1월 국무회의에서 계획되었다. 이후 1959년 12월까지 그 구간이 확대되어 서울의 주요 간선도로 모두로 확장되었다. 이후 서울 도심 곳곳의 하천정비와 재래시장 현대화사업으로 추진된 주상복합아파트로서 흔히 상가아파트가 건축되었으며, 13층 높이의 세운아파트(세운상가아파트, 1967년), 15층 높이의 낙원상가아파트(1968년) 등이 대표적이다.3)

[2000년대를 향한 서울시도시기본계획 (1990)] 대지역구분도

마포아파트외관전경2_1962

[2011년 서울도시기본계획 (1997)] 대지역구분도

서울특별시세운상가아파트부지처리의원회규칙제정(제823호)_1969

  • ¹ 마포아파트 초기 10층으로 건설하기로 기획되었으나, 6층으로 준공되었다. 또한 1차 준공 후 한달여가 지난 기간 동안 입주자가 절반에 미치지 못했다.
  • ² 경향신문, 1967년 1월 4일 ‘서울특별시 시정의 방향 11가지’
  • ³ 1967년부터 1970년 사이에 지어진 서울 시내 주요 상가아파트는 18곳이 넘었다.
[2000년대를 향한 서울시도시기본계획 (1990)] 대지역구분도

상가아파트건립자 공모, 1966-07-27~/IT1954907

[2011년 서울도시기본계획 (1997)] 대지역구분도

세운상가건립부지환지확정, 1970 /IT868502

[2011년 서울도시기본계획 (1997)] 대지역구분도

청계천 상가 아파-트 건립계획_ITIT1954629

판자촌 철거와 시민 아파트

1962년 '제1차 경제개발 5개년 계획'을 시작으로 서울은 급속한 산업화와 도시화를 겪게 된다. 특히 서울로의 인구집중은 급속히 심화되어 1963년에 이르러서 서울의 인구는 300만을 넘게 되었다. 이러한 서울의 급속한 성장으로 인하여 1966년 '서울도시계획기본계획'이 수립되었다. '서울도시계획기본계획'은 12년을 2기로 나누어 각 1기마다 5개년 계획과 그 중간에 2년간의 유예기간을 두었으며, 도시기본계획에서는 기능 분산을 위해 입법부를 남서울에, 사법부를 영등포에, 행정부를 용산에 입지하도록 제안되었다.
이 시기 서울은 종로에서 남산에 이르는 폭 30~50미터의 방공 소개용 공지에 피난민들의 판잣집이 이 일대를 뒤덮고 있었다. 서울특별시는 김현옥 시장의 주도하에 '무허가건물 연차별 정리계획(1965~1970년)'을 추진하였으나, 보다 근본적인 해결을 위해 1967년 '불량건물 정리계획(1967~1969년)'을 수립하였다. 이에 따라 ‘대단위 조성계획에 의하여 집단적으로 이주 정리, 현 상태의 불량건물을 지역별 혹은 단독으로 개량 정리, 현 상태의 불량건물을 골조아파트로 건립을 추진한다’는 계획을 세웠다. 그 결과 세운상가를 위시한 대규모 건물을 건립하기 위해서 2천 여 세대의 판잣집을 철거하였고, 철거된 무허가건축물 거주자들은 모두 상계동으로 옮겨 가야 했다.1)

1967년부터 정부는 ‘제2차 경제개발 5개년 계획’ 수립에 의한 정책과제로 주택건설계획을 수립하고, 서민주택의 대량건설을 목표하였다. 서울특별시는 정책 방안에 따라 1969년 시민아파트 건립사업을 추진하여 시영주택 혹은 시영아파트로 불리는 서울 주택유형의 대표적 사례가 탄생한다. 그러나 1970년 4월 일어난 와우아파트 붕괴사건으로 인해 김현옥 시장은 사퇴를 하고, 시민아파트 건설사업은 중단되었다. 이에 따라 1969년~1972년 32개 지구에 425동 1만7,204가구를 기록한 시민아파트는 더 이상 건립되지 않았으며, 1969년~1970년부터 건설이 활발히 진행된 맨션아파트와 시범아파트로 상황이 전환된다. 한편, 첫 번째 정책 방안에 따라 조성된 광주대단지는 도시의 기반시설이 채 갖춰지기전 대규모 이주를 강행하여, 1971년 8월 이른바 광주대단지 사건(8·10 성남 민권운동)으로 비화되었다.

[2000년대를 향한 서울시도시기본계획 (1990)] 대지역구분도

서울도시계획기본계획수립, 1966 / IT167265

[2011년 서울도시기본계획 (1997)] 대지역구분도

서울시내 시민아파트 공사현장, 1969-05-09 / IT410

  • ¹ 당시 서울에는 서대문 금화지구 7만채를 포함하여 100만 평 땅에 14만 5천 채의 판잣집이 있었다.(강준만, 『한국현대사산책 1970년대 1권』 인물과 사상사, 2002, pp.51~52)
[2000년대를 향한 서울시도시기본계획 (1990)] 대지역구분도

시민 아파트 건립계획 보고[사본] / IT689981

[2011년 서울도시기본계획 (1997)] 대지역구분도

잠실추가지구 토지구획정리사업 시행 명령 / IT1188578

한강 정비와 한강맨션아파트의 등장

제1차 한강종합개발사업의 일환으로 1967년부터 1970년까지 추진된 ‘한강개발 3개년 추진계획’1) 에 따라 공유수면매립사업(동부이촌동, 압구정동, 여의도, 잠실)이 시행되어 강변1로2)를 건설하여 2만 4천평의 택지를 조성하였으며, 강변2로3) 건설로 신길동·당산동 일대에 14만 4천평의 택지를 조성할 수 있었다. 이렇게 조성된 택지 중 북쪽 택지를 공무원연금기금이 매수하여 공무원아파트 34개 동, 1,313가구를 지었고, 남쪽 택지는 대한주택공사가 매수하여 한강맨션아파트 23개 동, 700가구를 건립하였다. 그리고 그 서쪽에 외국인아파트 18개 동, 500가구를 지었다. 1960년대 후반기에서 1970년대 초에 걸친 동부이촌동 아파트 마을은 이렇게 형성되었고 그것은 서울에서 아파트 붐의 시발점이 되었다. 한강맨션아파트의 건립은 아파트의 맨션시대를 견인·선도했다.

이후 여의도 시범아파트와 반포주공 1단지가 건립되면서 대단지 아파트가 서울에 만들어졌다. 이중 여의도시범아파트는 ‘여의도 종합 개발계획’에 의해 1971년 양택식 시장이 '아름다운 신시가지'를 만들겠다는 취지로 만들어졌으며, 엘리베이터와 사시사철 온수가 공급되는 등 최신 시설로 서울특별시에 직접 건설하여 민간 분양하였다.

[2000년대를 향한 서울시도시기본계획 (1990)] 대지역구분도

여의도 한강개발공사 기념비/ 서울역사박물관

[2011년 서울도시기본계획 (1997)] 대지역구분도

인도 하원의장, 서울시청 방문, 1973-06-27 / IT5041

  • ¹ 한강개발 3개년 계획은 ‘여의도에 제방을 쌓아서 가능한 많은 택지를 조성한다. 여의도와 마포·영등포를 연결하는 고량을 가설한다.
      한강을 사이에 두고 남북의 제방도로를 연차적으로 축조함으로써, 한강홍수를 방지할 수 있을 뿐 아니라 자동차가 고속으로 달릴 수 있도록 한다’는 것이었다.
  • ² 제1한강교 남단기점 여의도입구까지의 3.7km의 구간
  • ³ 제1호의 끝에서 제2한강교(양화대교)까지의 3km의 구간
[2000년대를 향한 서울시도시기본계획 (1990)] 대지역구분도

여의도종합개발계획, 1968-07-25_ IT1413600

[2011년 서울도시기본계획 (1997)] 대지역구분도

여의도종합개발계획, 1968-07-25_ IT141360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