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울의 주택재개발과 도시개발
「택지개발촉진법」과 서울
산업이 발전한 1970년대부터 인구의 도시집중이 가속화되어 도시지역의 주택난이 심각하게 대두되었다.
이에 정부는 한정된 토지를, 고밀도로 이용할 방안을 고민하였다. 이 과정에서 전두환 정부는 서울올림픽을 유치하고, 올림픽 준비를 위한 관련 사업을 국정과 서울시정의 핵심과제로 추진했다.
특히 주택 500만 호 건설을 국정의 핵심과제로 정해 서민주택 공급을 위한 대규모 건설사업을 추진했으며, 뒤를 이은 노태우 정부 또한 주택 200만 호 건설을 국정과제로 삼아 주택 공급을 국정의 핵심으로 삼았다.
그러나 당시 주택을 공급하기 위한 토지구획정리방식은 환지방식에 의하여 토지를 배분하는 것이었다.
이는 단독주택용 규모로 택지를 개발할 수 밖에 없는 구조였으며, 토지소유는 영세하게 되어 있기에 정부에서 추진하는 대규모 주택 공급을 위한 방식에는 한계가 있었다.
이에 정부는 대규모의 공동주택지 조성을 위해 「택지개발촉진법」이 1980년 12월 31일 제정하였다.
「택지개발촉진법」은 도시지역의 시급한 택지난을 해소하기 위하여 주택건설에 필요한 택지의 취득ㆍ개발ㆍ공급 및 관리 등에 관하여 특례를 규정함으로써, 국민 주거생활의 안정과 복지향상에 기여하기 위해 제정되었다. 이 법은 당해 택지개발예정지구와 연계된 도로ㆍ철도 등 사회간접시설을 확충하는 동시에, 개발이익을 공공부문으로 환수하여 타 택지개발사업 재투자 및 지역균형개발을 유도할 뿐만 아니라, 공공택지의 대량 개발 및 토지 비축기능 확충으로 부동산투기 억제 및 지가안정을 도모할 수 있도록 하였다. 하지만 개발된 택지를 토지소유자에게 배분하게 되기 때문에 토지소유자가 개발이익을 독점하게 되고, 지가상승에 따른 차익만 기대하여 건축을 기피하는 현상 또한 나타났다.
「택지개발촉진법」의 결과 대규모 택지개발사업과 신도시 건설이 단기간에 추진되었고, 서울시 도시계획과 공간 변화에도 큰 영향을 주었다. 특히 서울시 변두리 지역의 미개발지 대상으로 공공 주도로 대단위 택지개발사업을 추진하게 되었다. 서울 변두리 지역의 자연녹지지역과 농경지 등의 미개발지 등 지역적 안배를 고려하여, 고덕지구, 개포지구, 중계·상계지구, 목동지구, 수서지구, 일원지구, 가양지구 등을 주요 대상지로 하였다. 그러나 서울시 주도적으로 시행한 곳은 목동지구였으며, 나머지 지구는 정부 주도의 특별법으로 한국토지개발공사와 대한주택공사가 주도적으로 수행하였다.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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¹ 국가·지방자치단체·한국토지공사·대한주택공사 등의 공공시행자와 지방공사, 공공시행자와 공동으로 개발사업을 시행하는 주택건설 사업자가 시행하는 방식으로 이 법을 근거로
분당이나 일산 같은 1기 신도시는 물론 광교 동탄 등 신도시가 탄생했다.
불량·노후 주택 문제
서울시는 서민 주거 안정화와 열악한 주거환경에 대한 장기적이고, 계획적인 정비를 위해 양택식 시장 때인 1973년 서울 전역에 불량주택재개발사업지구 196개소를 지정하였다. 그러나 불량주택재개발사업은 주민의 자력재개발방식에 의존하여 추진되었기에 1983년까지 추진 실적이 매우 저조했다. 1981년 서울시는 88서울올림픽 개최와 관련한 도시환경정비사업의 하나로 불량주택재개발을 선정하였고, 도시의 미관상 가시권에 있는 불량주택 밀집지를 우선 철거대상으로 정해 합동개발에 따른 재개발사업을 통해 정비하고자 하였다. 이 시기 서울은 택지개발사업으로 주택을 공급했지만, 더 이상 주택 공급을 위한 넓은 땅을 찾기 힘들었다. 서울시는 문제 해결 방법의 하나로 불량재개발사업지구를 주택 공급기지로 활용해 양질의 아파트를 공급하고자 했다. 이를 위해 합동재개발사업 세부시행지침을 마련하여 세제감면 혜택, 국공유지 불하 등의 완화 조치를 취했다.
1983년 염보현 시장은 ‘불량주택재개발 활성화 추진계획’을 통해 주민의 부담을 덜면서, 개발이익을 얻을 수 있는 순환개발방식, 합동재개발방식, 대민 홍보 등의 계획을 세웠다. 그 결과 1983년 토지소유자와 건설사가 함께 재개발사업을 하는 ‘합동개발방식’이 도입되면서, 불량주택재개발사업은 새로운 전환기를 맞게 된다.
합동재개발방식은 올림픽 준비를 위해 도시미관 개선에 기여하였으며, 현대적인 아파트단지 건설과 양질의 주택을 공급하였고, 공공시설의 확충과 주거환경의 개선 등의 성과를 나타냈다. 그러나 원거주민의 낮은 정착율로 인한 기존 지역사회의 붕괴, 부동산 투기 과열, 고층·고밀도 아파트로 인한 도시경관과 자연환경 훼손, 저소득층이 생활터전을 잃어버리는 등의 문제도 발생하였다.
서울의 신시가지 조성
1980년대 서울 시민의 상당수가 노후하고, 밀도 높은 기성시가지 내 주택에서 거주하였다. 정부와 서울시는 기성시가지 내 거주하는 서민층의 주택난을 해소하고자, 서울시 교외 지역에 서민주택 공급을 위한 대규모 택지개발사업을 통해 이주·분산을 유도하고자 했다. 이때 기존 거주하는 서민계층 위주의 주택 공급을 하되, 불량주택 밀집지 내 저소득계층과 일반계층까지도 고려해 주택 공급을 확대하기로 했다. 하지만 서울의 한정된 토지자원을 효율적으로 이용하기 위해서는 고도의 토지이용이 유리한 고층·고밀도 아파트단지 형태로 개발하여야 했다. 또한 택지개발의 취지를 살리기 위해 서민주택으로 중·소형 위주인 국민주택규모(85㎡)이하 주택 공급을 확대하려 하였다.
사업 추진의 시행 주체는 서울시와 대한주택공사, 한국토지개발공사였다. 1980년대 초기에 시행된 고덕지구(1981), 개포·양재지구(1981)는 한국토지개발공사와 서울시가 공동으로 사업을 추진하였다. 이어 개발된 목동지구(1983)는 서울시 「택지개발촉진법」을 적용하여 직접 구상한 최초의 개발사업으로, ‘계획적인 신시가지 건설’을 목적으로 추진하였다. 목동지구는 안양천 정비와 88서울올림픽에 대비한 시가지 현대화를 목적으로 추진한 사업으로, 서울시 서남권 중심지역 조성을 목표로 막대한 서울시의 예산을 투입한 역점사업이었다. 1980년대 택지개발사업은 서울시 전역에서 광범위하게 추진되었고, 당시 건립된 총 호수는 22만 9,364호로 약 80만 명에서 100만 명 정도를 수용할 수 있는 주택 공급량이었다.1)
- ¹ 권영덕·이봉경, 「서울, 거대도시로 성장하다」, 서울연구원, 2020, p.133
도시개발공사의 설립과 주택건설
노태우 대통령 취임 이후 추진된 주택 200만 호 건설 계획 중, 서울시에서 건설하기로 한 주택 수는 40만 호였다. 당시 서울시로서는 ‘서울시 종합건설본부’가 건설할 수 있는 연간 주택 수가 1,500~3,000호에 불과하였기에 현실적으로 실행하기 어려운 과제였다. 이를 위해 서울시는 대단위 택지를 확보 택지개발에 들어가는 비용을 감당하는 방식 즉, 서울시가 택지를 직접 개발한 후 민간에 아파트 부지를 매각하는 공영 개발 방식을 선택하였다. 이 과정에서 ‘도시계획과 택지개발 등을 전문적으로 수행하는 서울시 공기업’인 도시개발공사가 1989년 2월 1일 설립되었다.
도시개발공사 설립 직후인 1989년 8월 성산, 면목 등에서 영구임대주택의 건설을 시작으로 중계지구 3단계 아파트를 착공하였고, 1990년에 이르러서는 수서, 대치, 가양, 공릉, 방화, 월계지구 등의 택지개발사업을 추진하였다. 도시개발공사 설립 이후 서울의 택지는 공동주택 용지, 단독주택 용지, 상업 근린생활 용지, 종교 용지, 학교 용지, 공용 청사, 사회복지시설 용지 등으로 나뉘어 공급되기 시작했다. 1990년대 들어 도시개발공사는 본격적으로 아파트를 공급하기 시작했는데, 분양주택과 임대주택으로 구분하여 공급하였다. 1990년과 1991년 사이 약 1만 호를 공급하였으며, 1992년부터는 임대 기간을 50년으로 하는 공공임대주택을 공급하기도 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