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울의 아동복지」고아, 부랑아 그리고 입양
전쟁고아와 부랑아
서울은 6·25 전쟁으로 피해가 가장 극심한 지역이었다. 남과 북이 번갈아 점령하면서 도시는 심하게 파괴되었고, 전쟁기부터 먹고 살기 위해 몰려드는 난민들로 인해 북새통을 이뤘다. 전쟁으로 부모를 잃어버린 아이들도 서울로 몰려들었고, 부모가 있다 하더라도 극심한 빈곤으로 보호를 받을 수가 없어 거리를 떠도는 아이들은 부랑아, 구두닦이, 껌팔이, 식모 등으로 전전하였다.
6·25 전쟁으로 발생한 고아가 어느 정도였는지 정확한 통계는 없다. 다만 1953년 4월 말 치안국에서 추산한 수치는 17만여 명이었으나, 같은 해 12월 경향신문은 약 6만여 명 정도로 보도한 것을 보면 상당수의 전쟁고아가 발생했음은 분명하다. 이 시기 사회적으로 이들에 대한 보호정책이 절실하였다. 그러나 당시 정부 차원의 지원은 기대할 수 없는 상황이었기에 대부분의 구호자금은 유엔한국재건단(UNKRA), 주한유엔민간원조사령부(UNCACK) 등의 공적 원조와 주한미군들의 개별적인 후원이 중심이었다. 한편 전쟁고아들을 수용할 수 있는 시설은 해외원조단체들의 지원을 바라고 전쟁기간 동안 우후죽순 생겨났다. 이에 정부는 1952년 「사회사업을 목적으로 하는 법인시설 허가 신청에 관한 건」과 사회부장관훈령으로 「후생시설운영요령」을 제정하여 시설장이 재단법인을 설립하고 시장이나 도지사의 인가를 받아 시설을 운영할 수 있도록 하였다.1)
부랑아의 경우 1955년 보건사회부 후생과장이었던 김원규가 당시 서울 시내의 부랑아 수를 대략 5~6백 명이었다고 하는 것과2) 1959년 보건사회부에서 발간한 「보건사회통계연보」에 따른 부랑아 수용보호 상황을 살펴본다면, 적어도 수천여 명의 부랑아들이 수용되고 있었다. 이처럼 극심한 빈곤과 전후 사회혼란 및 가치관의 혼돈 상태에서 적절한 보호를 받지 못하고 방치된 소년들은 범죄를 저지르도록 내몰리게 되어 소년범 문제 또한 사회문제로 부상하였다.
- ¹ 김기숙, 1975. 한국 아동복지 사업 현황 : 아동복지시설에 관한 실태. 이대사회사업학과 학회지 9.
- ² 김원규,「거리의 부랑아를 어떻게 할 것인가」, 『새벽』 2·3, 1955.5.
서울의 경우 1950년 서울 수복 이후 거리에 유랑하는 고아가 크게 늘어났다. 1950년대 전쟁고아의 수용과 관련한 육아시설에 대한 정확한 통계를 파악하기는 어렵지만 대략적으로 해방 당시 10개였던 육아시설은 23개가 되었으며, 수용된 아동 수는 2,289명으로 해방 당시에 비해 약 2.8배가 증가하여 아동보호시설의 종류 및 수용인원이 점차 늘어갔다.1)
이 시기 정부는 늘어나는 고아를 수용하기 위하여 옛 종로초등학교를 임시응급구호소로 삼았고, 서울시 사회국장이 소장을 겸임하도록 하였다.
임시응급구호소는 수용인원이 약 900명에 이르렀으며, 1.4후퇴 때 서울을 떠나 제주도로 이들을 이송하여 보호하다가 1951년 민간으로 이양되어 한국보육원이 되었다.2)
1955년 ~ 1957년 사이에는 서울지역에서 전쟁고아와 부랑아 수용시설은 57개소에 달하였으며 약 7,500여 명이 수용되었다.
서울에서는 경찰들이 부랑아들을 모아 홍제동의 동북소년원이나 남산의 직업소년직업소년학교 등에 수용하였다.3)
1957년에는 ‘서울시립아동보호소’를 확대하기 위해 응암동으로 이전하였으나 밀려드는 부랑아를 감당하지 못하고, 곧 정원 500명을 초과하여 초만원이 되어 경찰이 잡아들인 부랑아를 대전, 춘천, 목포 등 지방으로 분산수용 시켜야 했다.
한편 1960년부터는 아동보호소 내에 초등학교를 설치하여 부랑아를 보호 육성하기 위해 노력하기도 하였다.
※ 서울시립아동보호소 서울시립아동보호소는 부랑아들을 수용해서 교화시키다는 목적으로 건립되었으며, 부랑아를 일시 수용하여 개개인의 내력과 성향 등을 감별하여 적용시키고자 하는 시설이었다.4) 서울시립아동보호소는 1958년 4월 1일 서울특별시립아동보호소 설치 조례(서울특별시조례 제145호) 시행으로 서울특별시 서대문구 응암동 산4-12에 설립되어 1975년 민간단체 위탁경영 전환되었으며, 1984년 서울특별시립 소년의 집, 2010년 서울특별시 꿈나무 마을로 운영되고 있다.
- ¹ 서울특별시 시사편찬위원회, 1983. 서울육백년사 6
- ² 한국보육원 홈페이지 (http://hanbowon.kr/sub4_5.html)
- ³ 경향신문, 한강에서 부랑소년잔치 삼백여명이 희망의 새출발, 1955. 6.1 / 동아일보, 말쑥해진 부랑아 300명을 목욕이발시켜 수용, 1956. 6. 1
- ⁴ 具慈憲, 1961. 『兒童福祉』. 서울남산소년교호상담소, 258쪽.
1950년대 중반 국가와 민간단체는 늘어나는 고아들을 시설중심으로 보호하는 것의 문제와 한계점을 인식하게 되었다.
많은 재정을 필요로하지 않으면서 고아들을 보호·양육할 수 있는 방법으로 ‘가정보호사업’이라고 할 수 있는 ‘입양’과 ‘가정위탁’을 추진하였다.
입양은 1950년 이전까지 국내 단위로 이루어지고 있었는데 6·25 전쟁 이후 다문화 아동(혼혈아)이 많아지면서 이들의 양육을 위하여 국외 입양이 거론되었다.
6·25 전쟁을 거치면서 ‘혼혈아’의 탄생은 당시 사회적으로 당혹스럽게 인식되고 있었으며, 혼혈아를 낳은 여성에게 비난이 집중되는 상황이었다.1)
또한 대중적 거부감 혹은 혐오로 혼혈아동은 놀림과 따돌림의 대상이 되었다.
이중 ‘전쟁 혼혈 고아’라 불린 이들은 전후 복구 과정에서 해외입양이 그 해결책으로 제시되었다.
1954년 전쟁고아 및 혼혈고아의 입양과 가정위탁을 위하여 한국아동양호회(현 대한사회복지회)가 설립되었고, 1955년 「해외혼혈아이민법」 미국에서 통과되면서 홀트 부부 등의 노력으로 800여 명이 넘는 혼혈아동이 미국으로 입양되었다.
1960년에 이르러서는 「신민법(新民法)」이 제정됨에 따라 기존의 양자에 관한 법률이 수정되어 비혈연적 입양을 허용하는 동시에, 아들이 있는 경우 성(姓)이 달라도 입양이 가능하도록 하였다.
그리고 1961년 「고아입양특례법」이 제정되면서 요보호 아동 해외입양을 위한 법적 규정을 마련하였다. 혼혈아로부터 시작된 해외입양은 차츰 비혼혈아동으로 입양 대상자가 확대되었다.
특히 혼인하지 않은 여성의 임신·출산에 대한 비난과 낙인은 ‘미혼모’라는 새로운 용어를 등장시켰으며, 해외 입양기관들 또한 미혼모 상담사업을 통하여 비혼혈 아동의 해외입양을 시작하였다.
1970년대 중반에 이르러서는 국내 입양을 촉진하기 위해 「입양특례법」(1976)을 개정하여 보호시설에서 보호받고 있는 자의 입양을 촉진하고
민법상 성과 본 불편 원칙을 포기할 수 있도록 하는 동시에 양친의 성을 따른 것이 가능하도록 하였다.
가정위탁사업은 친생부모가 아동을 일시적 또는 장기적으로 양육할 수 없거나, 양육하기에 부적절한 아동을 보호하기를 희망하는 가정에
일정기간 동안 대리 양육하도록 하는 제도로 대리양육가정위탁, 친인척가정위탁, 일반가정위탁 방식이었다. 정부는 1963년 대한양연회를 발족시켜 가정위탁을 원하는 사람들의 신청을 받아 아동을 위탁하고, 위탁양육비를 지급하였다.
서울시의 경우 각 구청에 아동복지지도원 1명을 두어 이 사업을 추진하였으며, 각 구청에서는 가정조사서를 작성하여 시청에 그 적격심사를 의뢰하고, 위탁양육비 지급은 국고보조금으로 하였다.
늘어나는 국외 입양으로 한국 정부는 1980년대 초, 국외입양 전면 금지 결정을 하였으나, ‘이민문호 개방정책’에 의하여 국외입양이 오히려 개방되었다. 특히 1980년대 이후 미국, 유럽 등지에서 한국 고아 입양 요청이 증가하고, 이민 확대와 외교 활성화를 이유로 해외입양을 전면 개방하면서 국내 입양은 연평균 약 2,500여 명인 반면, 연평균 해외 입양은 약 6,500여 명에 이르렀다. 하지만 1986년 아시안게임과 1988년 서울 올림픽을 계기로 세계로부터 경제 성장에 맞지 않게 여전히 국외입양을 계속하고 있는 ‘고아수출국’이라는 거센 비판을 받았다. 이에 ‘세계 1위의 고아 수출국’의 오명을 벗기 위해 ‘입양사업 개선 지침’ 등을 통해 국내 입양 활성화방안을 모색하였고, 1988년에는 국내입양 전문기관인 ‘성가정입양원’을 설립하였다.
- ¹1952년 8월 ~ 9월 사회부에서 조사한 전국 혼혈아 총수는 356명이었으며, 1953년 4월 7일 서울지역 관내 실태조사에 따르면 총 160명의 혼혈아가 파악되고 있었다.
- ²김현옥 서울시장은 우리나라 혼혈아를 돕기 위해 내한한 고아의 어머니 펄벅 여사에게 행운의 열쇠와 명예 시민증을 수여했다. (내용출처: 동아일보, 1968.03.14., 8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