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용산기지 건물 #5042

시대의 증언자

1941년경 일본의 '조선군사령부 제2청사'를 시작으로 미7사단사령부, 대한민국 육군본부, 미8군사령부 등이 이 건물을 사용하였다. 즉, 이 건물은 일제강점부터 6·25 전쟁, 5.16 군사정변, 용산기지의 설치와 반환이라는 근현대사의 주요 장면들을 고스란히 증언하고 있다.

(용산기지 건물 5042)타임그래프_이미지

건물 #5042는 용산기지 내 사우스포스트에 위치해 있다. 용산기지의 반환 이후에도 이 건물은 원형을 최대한 보존할 예정이다. 창이 없는 벙커 모양의 저층부는 문화시설 등으로, 창문이 많은 최상층은 방문자 센터로 활용하는 방안을 검토 중이다.

과거와 현재의 모습 변화

(용산기지 건물 5042)지번도에서 사우스포스트위치
(용산기지 건물 5042)_1948년

1948년 미7사단 사령부 사제들과 부대원들이 당시 '미7사단사령부 벙커' 앞을 지나고 있다.

(용산기지 건물 5042)_2019년

2019년 반환을 앞둔 일명 '사우스포스트 벙커'의 모습이다.

# 1941-1945, 조선군사령부 제2청사

조선군사령부는 1918년 한반도에 주둔하는 일본 육군 부대를 총지휘하는 지역사령부이다. 사령부는 1945년 2월 미군의 진격에 대비하여 일본을 방어하기 위해 육군 전체를 개편할 때 작전 부대인 제17방면군과 병참 등을 지원하는 조선군관구사령부로 개편되었다. 이때부터 조선 주둔 일본군은 한반도에서의 치안을 유지하는 기본 임무를 그대로 유지했지만, 또 하나의 기본 임무인 소련군에 대한 작전 대신에 미군을 상대하는 작전을 담당하게 되었다.

1941년 태평양전쟁이 발발하면서 일제는 조선군사령부의 방공작전과 정보작전을 강화하기 위해 견고한 벙커형의 정보작전센터를 구축하였다. 일제강점기 용산기지 건물 중 유일한 철근콘크리트조(RC) 건물로 벙커형의 육중한 모습을 띄고 있다 (건물 규모는 약 260평). 건물 1층에 정보실, 작전실, 통신실, 방송실 등이 배치되고 2층에는 사무실과 회의실 등이 배치되어 있다.

# 1945-1949, 미7사단사령부 벙커

광복 이후 일본군의 항복접수와 무장해제를 위해 미24군단 예하 미7사단이 용산기지로 진주하면서 일제강점기 조선군사령부 청사를 미7사단사령부 청사로 사용하고 조선군사령부 제2청사를 미7사단사령부 벙커로 사용하였다.

1948년 9월 24일 공중에서 본 미7사단사령부 전경 [서울기록원 기록건 CY0026]

1948년 9월 24일 공중에서 본 미7사단사령부 전경 [서울기록원 기록건 CY0026]

1948년 6월 27일 장엄미사를 위해 이동중인 미7사단 사령부 사제들과 부대원들 [서울기록원 기록건 CY0014]

1948년 6월 27일 장엄미사를 위해 이동중인 미7사단 사령부 사제들과 부대원들 [서울기록원 기록건 CY0014]

돌이켜보면 특별할 것도, 강렬한 점도 없는 짧은 만남이었다. 하지만 아흔에 이르러 
회상해 보니 그 장면이 또렷하게 떠오른다. 박정희 전 대통령과 나, 우리 둘이 처음
만난 장면 말이다. 육사를 8기로 졸업한 1949년 6월, 나는 육군본부 정보국에서 장교로서
첫발을 디뎠다. 동기생 일곱이 정보국 전투정보과에 배치됐다. 발령식 때 정보국장이던
백선엽 대령이 우리에게 말했다.

"너희가 신고 드릴 분이 한 분 더 있다. 작전실로 가서 인사 드려라.”

바로 옆 ‘작전정보실’이란 팻말이 붙은 작은 방으로 가서 인사를 건넸다.

"이번에 전투정보과에 배속된 신임 소위들입니다. 신고를 받으십시오.”

작전정보실장이란 타이틀을 가진 사내는 검은색 양복을 입고 있었다. 검은 옷 탓이었을까.
참 키가 조그맣고 얼굴이 새카만 첫인상이었다. 그는 우리에게 계면쩍게 웃어 보이며 말했다.

"나 박정희요. 근데 난 그런 신고 받을 사람이 못 돼. 거기들 앉게.”

악수를 나누고 잠시 의자에 앉았다. 박 실장은 “내가 사고를 당해서 군복을 벗었다”고
간단히 본인을 소개했다. 이어 "육사를 우수하게 졸업한 장교들이라고 들었다. 환영한다"며
짧은 대화를 나눴다. 군복을 벗고 정보국의 문관으로 일하던 그분과의 첫 만남이었다.

<13장 - “난 그런 신고 받을 사람이 못 돼"> 중에서

# 1949-1950, 대한민국 육군본부 벙커

1949년 6월 주한미군이 한반도를 모두 철수하면서 을지로에 있던 대한민국 국방부와 육군본부가 용산기지로 이전하면서(「육군본부 이전」, 조선일보(1949.7.1)) 대한민국 육군본부 벙커(정보작전실)로 활용하였다. 이 곳에서 박정희, 김종필, 장도영 등 한국현대사에 큰 궤적을 남긴 인물들이 거쳐갔으며 무엇보다도 6.25 전쟁 발발 당시 한강다리 폭파 결정도 이 곳에서 결정되었다.

북한군 점령 예상 동선 지도

# 1950.6.28 ~ 1950.7.4, 북한군 3사단 점령

6.25 발발 직후 북한군 3사단은 용산기지를 점령해 지휘소를 설치하였다.
(RG554, General Correspondence ("Decimal File"), Assistant Chief of Staff, G-2 Theater Intelligence Division, Interrogation Reports, Issue No. 96 (North Korean Defensive Tactics / North Koran 3d Inf. Div. / North Korean 5th Inf. Div.,General Headquarters, Far East Command, Supreme Commander Allied Powers, and United Nations Command)

재건한 용산기지 앞에 서 있는 미8군의 모습

# 1952-1953, 미8군사령부 전진지휘소 재건

6.25 전쟁 기간 피아 간 공방속에서 극심한 피해를 받은 용산기지를 미8군이 재건하였다. 그 과정에서 미8군은 대한민국 육본 벙커를 복구하였다. 미8군사령관은 1952년 10월 25일 극동군사령부로 용산기지 내 벙커와 방공호 터널 복구를 요청, 1953년 4월 18일 미8군 전방지휘소(Advance CP, Eighth Army Headquarters) 공사를 개시하였다.

# 1953-1960년대, 미8군사령부 전진지휘소

정전협정 직후 미8군사령부가 용산기지로 이전하면서 미8군 전방지휘소(벙커) 및 전쟁상황실로 사용되었다. 일명 '미8군 벙커'로 불렸는데 정전협정 직후부터 1960년대 말까지 미8군 벙커로 사용되면서 5.16 군사정변 등 한국현대사를 지켜본 중요한 역사적 장소이다.

나는 이날 새벽 일찍 미8군 지하벙커의 전쟁상황실에 있었다. 8군 전쟁상황실은 만원이었다.
새벽 일찍 8군사령관 카터 B. 매그루더 대장을 비롯, 주한미고문단장 해밀턴 H. 하우스 소장
등 주요 장성들은 물론 유능한 CIA 요원인 드실바를 비롯한 정보 요원들로 꽉 차 있었다.

미군이 아직도 5만 이상이나 주둔하고 있는 대한민국에 군사 쿠데타가 났다는 것은 엄청난
일이 아닐 수 없었다. 정보 관계자들이 수시로 상황을 보고해 왔고, G2 책임자가 이 상황을
보고할 만한 책임자에게 분초를 다투며 정보를 건넸다. 그러나 3년간 전쟁을 치렀고 아직도
전쟁에 대비해 구성돼 있는 조직적인 전쟁상황실이지만 한국군 쿠데타를 어떻게 다룰 것인가를
판단하고 결정할 능력은 갖추고 있을 리 없었다. 그것은 특히 한미 정치 관계의 매우 중요한
문제이었으며 최종 결심은 백악관의 고유 권한에 속하는 것이기도 했다.

- 짐하우스만,정일화 공저, "한국 대통령을 움직인 미군대위", 한국문원, 1995, pp.47~48
사우스포스트 벙커의 현재 모습 (2017년 촬영)

사우스포스트 벙커의 현재 모습 (2017년 촬영)

# 1970년대-현재, 사우스포스트 벙커

1969년 메인포스트의 미8군사령부 옆에 새로운 벙커(UNC Command Center)를 구축하면서 용도가 변경되었다. 이 벙커는 1979년 12.12 사태 당시 노재현 국방장관이 피신했던 곳이다. 당시 노장관은 육본벙커, 미8군 영내의 연합사 벙커 등으로 피신했다. 현재 구 조선군사령부 제2청사이자 한 때 대한민국 육본 정보작전실로 사용됐던 이 벙커는 한미연합사 연습처에서 사용 중이고 일명 ‘사우스포스트 벙커(South Post Bunker)’로 불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