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연은 등록한 이들만 가능하고, 각본은 사전에 심의를 ‘득’해야 했던 ‘답답한’ 시절이 있었습니다. 그 시작을 대개 1963년으로 봅니다. 지금은 찾아볼 수 없는 예술 검열정책인 공연자등록제, 사전 각본심의제 등이 실시된 해입니다. 많은 예술인들의 반발 속에서도 38년 동안이나 유지된 <개정공연법시행령>은 시대적 변화를 반영하지 못하는 규제 조항으로 꼽혀 1999년 결국 폐지됐습니다.
늦었지만 그 덕분에 지금 세계적으로 확장되고 있는 ‘K-컬처’의 에너지가 본격적으로 축적될 수 있었다는 해석이 나옵니다. 또 하나 재미있는 사실은 오랜 기간 공연계를 위축시키는 검열 수단으로 기능했던 ‘공연자등록제’가 역설적으로 1970~1980년대 예술가들의 활동부터 공연사를 추적하고 당시 예술계의 환경을 엿보는데 특별한 기여를 하고 있다는 점입니다. 제도 시행 과정에서 쌓인 기록을 통해서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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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회충 잡으려다 사람잡는 격’ 극작가 이근삼의 비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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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63년 6월 7일, 정부 주도로 <개정공연법시행령>이 통과됐습니다. 시행령에 따르면 교육이나 종교적 목적, 기념일 행사, 문화공보부령으로 정하는 의식 및 요식업소 등에서 공연을 하려는 공연자는 ‘공연자등록증’을 의무적으로 발부받아야 했습니다. 시행령에는 공연자등록제 외에도 무대 공연물의 각본 심사, 공연신고제, 공연장 설치 기준령 등의 내용이 포함되었습니다. 즉 공연자나 공연의 기준을 각령으로 정해 기준을 갖춘 공연자와 작품만 유료 공연을 하도록 규정한 것입니다.
공보부가 밝힌 시행령 제정 이유는 ‘농악, 국악, 악극, 가무, 연예, 곡예, 가극, 연극, 영화공연자 등 수백 개가 넘는 각종 공연단체가 난립하여 건전성을 잃어가고, 급조된 단원들로 투기적 흥행을 일삼아 사회 풍조를 문란하게 한다는 것’¹이었습니다. 하지만 공연자 등록제에 대해 “회충 잡으려다 사람잡는 격”이라 꼬집은 극작가 이근삼을 비롯해 이해랑 연출가 등 여러 예술가들은 <개정공연법시행령> 중 공연자 등록제도나 각본 심사제도는 ‘일제 말기의 강압정책에서나 볼 수 있는 시대를 역행한 모순적 법령’이라고 비판의 목소리를 높였습니다.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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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연법 시행령의 부당한 등록·각본 심사제 문제를 다룬 1963년 6월 13일자 경향신문 기사이다. 유치진, 이근삼, 이해랑, 이원경 등 당대 극예술인들이 이름을 걸고 시행령의 부당함을 지적하고 있다.²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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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연자 등록은 개인과 단체를 합쳐 1만2,000여 건에 달했는데, 소규모라도 등록없이 공연할 때는 200만원의 벌금을 물어야 했습니다. 또 공연단체를 설립하거나 단체의 이름 변경, 폐업 등의 상태 변경이 있을 때도 의무적으로 신고해야 했습니다. 이 과정에서 남은 공연자 등록증을 통해 당시 연극단, 악극단 외에 곡예단, 오페라단, 연주단, 마술단, 인형극회 등 다양한 예술 단체가 존재했음을 확인할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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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연법시행규칙 중 개정령공포통지>, 1983.3.15., 서울특별시 행정국 민원과(64~72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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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연자로 등록하려면 해당 단원의 이력서와 신원증명서, 대표자의 이력과 신원증명서, 단원의 명부, 계약금과 봉급 정보 등 여러 서류를 제출해야 했습니다. <공연법시행규칙 중 개정령공포통지>를 살펴보면 별지로 공연자 등록사항, 변경사항, 공연자 등록증 재교부 신청서, 폐업 등 신고서, 공연장 설치 허가 신청서, 공연장 정원 초과 사용 허가 신청서 등의 신청 서류와 처리 절차가 담긴 서식이 첨부되어 있습니다. 당시 문교부에서 어떤 내용을 관리했는지 파악할 수 있는 자료입니다.
또 이전에는 필요하지 않았던 요식업소(빠, 캬바레, 나이트크럽, 사롱 등)에서 공연하는 자도 해당 월 말까지 의무적으로 공연자 등록을 해야 했습니다. 등록할 때는 신청서 외에 사진을 첨부한 이력서와 단체 설립 서류, 전속계약서 등 꽤 많은 서류를 첨부해야 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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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연법 시행규칙 제정에 따른 공연자 등록 사무처리>, 1967.9.13., 서울특별시 내무국 시민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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증명사진 붙은 이력서, 신원조회서까지 포함된 공연자 등록신청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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눈길을 끄는 공연자 등록제 기록 중에는 연극의 대중화를 캐치프레이즈로 삼아 활동한 ‘극단 산하’의 차범석 대표의 사례가 있습니다. 대표 차범석이 김유성 등 동지들과 1963년 9월 28일 만든 극단 산하는 손창섭의 소설 <잉여인간>을 각색한 창립 공연 이후 운영위원장에 하유상, 운영위원으로 이기하, 김유성, 조기진, 임희재, 구민, 이순재를 지명하고, 최영일, 강부자, 조희자 등을 입단시키며 한국의 리얼리즘의 최고봉이라고 불리는 <산불> 공연으로 전국을 뒤흔들었던 극단입니다. 하지만 연극계는 검열 등으로 활동폭에 제한을 받으며 상황이 열악해졌고, 극단 산하는 창단 20년을 맞은 1983년 공연 <옛날 옛적에 훠어이 훠이>를 끝으로 자진 해산했습니다.³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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극단 산하의 공연자 등록신청서에는 대표자 차범석의 이력서, 주민등록증, 신원조회이력서 등 개인 정보 문서가 첨부되어 있습니다. 지도 대신 손으로 그린 극단의 약도와 극단 산하의 정관도 함께 제출되었고, 준비밀 취급을 요하는 문서라 공개할 수 없지만 뒤에 첨부된 내무부 신원조회 회보서에는 차범석이 ‘노동자 위안 공연을 자수’한 바 있으며 ‘온순 단정한’ 성질이라는 예술가의 성향까지 적어 놓아 당시 시대상을 짐작하게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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극단 산하는 공연자 등록 신청 이후 공연자등록증 갱신신청서를 다시 제출하는데, 해당 신청서에는 전속 배우들의 이력서가 첨부되어 있습니다. 남일우, 이순재, 변인철(변희봉), 강효실, 김영옥, 나문희, 강부자 등 평생 연기자의 길을 걸었던 대배우들의 당시 이력서에는 서른 살 안팎의 앳된 얼굴 사진도 그대로 남아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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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춘곡예단, 한미영배사 등 예술 단체 활동 기록 눈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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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한민국 최초의 서커스단이었던 동춘연예단도 대표 박동수의 이름으로 1962년 5월 18일 공연자 등록신청서를 제출했습니다. 1925년 창단된 동춘연예단의 전성기는 1960년대였습니다. 구봉서, 허장강, 배삼룡, 이주일 등 당대 최고의 희극인을 배출한 곡예단이기도 합니다. 하지만 1970년대 텔레비전이 등장하면서 이들의 인기는 내리막길을 걷습니다. 상당수 관객을 TV 드라마에 빼앗겼기 때문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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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상가상으로 1978년에는 천막극장이 무너지는 큰 사고까지 발생했습니다. 창단주 박동수를 이어 단장을 맡은 아들 박영조는 1981년 1월 23일 동춘곡예단을 내놓았습니다. 당시 제출한 공연자 폐업 신고서에 따르면, ‘전국’ ‘임시공연장’에서 공연을 펼쳐오던 ‘동춘곡예단’의 폐업 사유는 ‘경영난’이었습니다. 이후 전속 출연자이자 주연배우였던 박세환이 동춘곡예단을 인수하였고, 이후에도 숱한 굴곡을 겪으며 오늘날까지 동춘서커스단이라는 이름으로 명맥을 이어가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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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연자 등록 대상에는 영화공연자로 분류된 배급업자도 포함됐습니다. 연합영화공사의 전신 ‘한미영배사’는 한규호 대표가 1970년대 종로 일대에서 운영되던 순회용 영사 필름 배급업체 10여 곳을 통합해 설립한 회사였습니다. 한미영배사는 영화 상영에 필요한 영사기, 발전기, 확성기, 이동차량 등을 가지고 여러 지역에서 상영했던 1970년대 14개 순회영사업체 중 가장 큰 규모의 업체였습니다.⁴
한규호 대표가 제출한 공연자등록증 갱신신청서에는 국세, 시세, 완납, 또는 미과세 증명서, 대표자의 주민등록표, 발전기 및 영사기 증빙서, 영사반 편성표, 2년간 공연 실적서가 4,800원 어치의 수입인지와 함께 첨부되어 있습니다. 여기에는 당시 영사기 명칭과 수량, 전국의 영사 반원들의 이름과 나이, 2년간 전국에서 공연된 영화 제목과 동원 인원도 기재되어 있습니다. 기록에 따르면 영화 상연은 거의 하루도 빠지지 않고 이루어졌고, 면 단위의 지방 곳곳을 순회할 때마다 700~1,000여명의 관객이 모였을 정도로 성황이었습니다. 관객의 남녀 성비는 거의 비슷했고, 평지에 말뚝을 세워서 만든 극장이었던 만큼 우천과 장마 등으로 상연이 연기되었다는 표시도 많이 보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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