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천만 관중 시대 한국 야구 역사의 중심지, 서울의 야구장

정도의 차이가 있지만 모든 스포츠는 직간접으로 즐기는 애호가, 덕후들과 함께 성장합니다. 그중 역사나 애호가들의 규모, 나아가 관련 시장 규모 면에서 야구만한 종목도 드물 겁니다. 1887 미국에서 세계 최초의 프로야구 리그가 탄생한 100 뒤인 1982년에는 대한민국에도 프로야구 시대가 열렸습니다. 2024년에는 인기를 가늠할 있는 특별한 기록이 등장하기도 했습니다. 처음으로 1000 관객을 돌파, 역대 최다 관중 신기록을 실현한 것입니다. 서울은 가장 많은 프로야구 구단을 보유한 지역입니다.

2024
현재 LG트윈스와 두산 베어스, 키움 히어로즈 3개의 프로야구 구단이 존재합니다. 이렇게 존재감 야구이기에 이야기할 있는 주제 또한 무궁무진합니다. 가운데 이번 주제는 가장 기본적인 인프라인야구장입니다. 서울의 3 구단은 잠실야구장과 고척스카이돔 2개의 야구장을 이용하고 있지만, 경기장은 하나가 있습니다. 목동야구장입니다. 여기에 지금은 사라졌지만 오랫동안한국 야구의 성지였던 동대문야구장 기록도 찾아보았습니다.

한국 야구의 성지동대문야구장

  • 소재지 : 서울특별시 중구 을지로 7( 동대문디자인플라자 소재지)  
  • 운영 기간 : 1925 ~ 2007 
  • 활동 프로 구단 : OB 베어스 (1985)  
  • 구장명 변천 : 경성운동장 야구장(1925~1945) 서울운동장 야구장(1945~1984) 동대문야구장(1985~2007)  

우리나라 최초의 야구장은동대문야구장입니다. 지금은 사라져 없지만경성야구장이라는 이름으로 시작해서울야구장 거쳐 동대문야구장으로 불린 이곳은 서울의 야구 역사를 간직한 대표적인 장소였습니다. 동대문야구장이 본격적인 야구 경기장의 형태를 갖춘 것은 일제강점기 때인 1925 경성야구장이 세워지면서부터입니다. 그런데 경성야구장이 건설되기 전부터 이곳에서는 야구 경기가 열리고 있었습니다. 야구장이 들어선 자리는 조선시대 훈련원이 있던 곳으로, 한국 최초의 야구팀이라는 기록을 가진황성YMCA’ 연습과 시합을 했던 장소이기도 합니다.¹ 훈련원에서는 경성야구장이 지어지기 전까지 다양한 야구 경기가 펼쳐졌으며, 오랜 세월 군사 훈련장으로 다듬어진 훈련원의 지형은 야구 경기를 하기에 당시로서는 최적의 조건을 갖춘 곳이었을 것으로 보입니다.²


해방 경성야구장은서울야구장으로 이름을 바꾸며 새로운 시대를 맞이하게 됩니다. 서울을 대표하는 야구장으로 자리 잡은 서울야구장에서는 고교야구와 실업야구처럼 아마추어 경기뿐 아니라 아시아야구선수권대회와 같은 주요 국제 야구 경기가 열리며 한국 야구의 중심지 역할을 했습니다. 그러다 1982, 잠실야구장을 포함한 잠실운동장이서울종합운동장으로 명명되면서, 이곳의 이름은 다시동대문야구장으로 바뀝니다. 같은 한국 프로야구가 출범할 즈음 서울의 대표 야구장으로서의 지위는 잠실운동장으로 옮겨가게 됩니다


하지만 흥미롭게도 1982 한국 프로야구의 역사적인 개막전이 열린 장소는동대문야구장이었습니다. 당시에 벌써 잠실야구장이 완공된 상태였으나, 개장 목적이 같은 개최된 세계야구선수권대회였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OB 베어스( 두산 베어스) 1985 동안 동대문야구장을 홈구장으로 활용하며 프로야구와의 연결고리를 이어갔습니다. 이후에도 동대문야구장은 철거되기 전까지 아마추어 야구의 메카로 사랑받으며, 한국 야구 역사에서 중요한 역할을 이어왔습니다. 그러나 계속되는 재정 적자와 시설 노후화 등의 문제로 2006 철거가 결정됐고, 수많은 이들의 뜨거운 함성과 추억이 새겨져 있는 동대문야구장은 2007 결국 역사의 뒤안길로 사라졌습니다. 현재 자리에는 2014년에 개장한 동대문디자인플라자(DDP) 자리하고 있습니다. 철거 당시 동대문야구장에서의 추억을 떠올리며 아쉬워하는 이들이 많았습니다.

“1925 최초의 야구장이 만들어졌다. 광복 이후 재개장된 동대문야구장은 프로 출범 이전까지 한국야구의 성지였다. 야구를 보려면 누구나 동대문에 가야 했다. 야구장에 모인 사람들이 어깨동무를 하고 모교를 놓아 부르는 장면 자체가 하나의 훌륭한 디자인이었다. 프로야구 시즌 개막전도 이곳에서 열렸다. 시즌 올스타전도 물론 동대문에서 치렀다. 과거야 어찌되었든 이제 그것은 발파되고 철거되었으며 반대하는 목소리는 흘러 없어지거나 사라졌다. 그곳 지하철 이름은동대문역사문화공원역이다. 무엇이 역사고, 무엇이 문화인가. 그리고 무엇이 디자인인가. 역의 이름만으로는 관철되지 않는 뭔가를 우리는 잊고 있지 않은가.” ³

지금도 보존되고 있는 동대문운동장의조명탑

기록으로 확인할 있는 흥미로운 사실 하나는 현재 동대문디자인플라자가 자리한 동대문역사문화공원에 동대문운동장의 흔적이 남겨져 있다는 점입니다. 바로조명탑입니다. 동대문야구장에 조명탑이 세워진 것은 1966년으로, 이때 비로소 밤에도 야구 경기를 있게 됐습니다. 조명탑은 1963 아시아야구선수권대회에서 한국 대표팀이 우승하자, 당시 실질적으로 정부를 이끌던 박정희 국가재건최고회의 의장이 선수단에게 포상의 일환으로 설치를 지시하면서 세워졌습니다. 그리고 1966 9, 야간 경기가 열렸습니다. 이날 경기는 실업야구팀 한일은행과 제일은행이 맞붙은 경기로, 순간을 기념하기 위해 박정희 대통령이 시구를 하기도 했습니다.
<서울야구장조명탑설계도> 입면도. 1966.,
서울특별시 내무부 총무과  
<서울야구장조명탑설계도> 배면도. 1966.,
서울특별시 내무부 총무과  

<서울운동장 야구장 라이터 점등식>, 1966.10.07., 서울특별시 공보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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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로야구의 메카잠실야구장

  • 소재지 : 서울특별시 송파구 
  • 존속 기간 : 1982 7 ~  
  • 사용 프로 구단 : MBC 청룡-LG 트윈스(1982~) / OB 베어스-두산 베어스(1986~)

잠실야구장 대한민국에서 가장 규모와 시설을 자랑하는 상징적인 야구 경기장입니다. 플레이트에서 중앙 펜스까지의 거리는 125m, 좌우 펜스까지는 100m 달하며, 펜스 높이는 2.6m 설계되었습니다. 이러한 특성 덕분에 잠실야구장은 우리나라 프로야구 구장 홈런이 가장 나오지 않는 구장으로도 알려져 있습니다. 1982 개장 이후 잠실야구장은 프로야구뿐만 아니라 다양한 국제 경기가 개최되었습니다.


잠실야구장의 건설 배경을 이해하려면 안에 포함된 '잠실종합운동장' 역사부터 살펴봐야 합니다. 국민들이 박정희 대통령의 유신정치에 염증을 느끼던 1976 , 21 캐나다 몬트리올 올림픽에서 한국 선수들이 유도, 배구, 레슬링 종목에서 메달을 획득하며 스포츠에 대한 국민적 관심이 고조되었습니다. 이에 박정희 정부는 1982년에 개최될 9 아시아경기대회를 서울에 유치하기 위해잠실종합운동장건설 계획을 발표했습니다. 정부는 이미 은밀하게 잠실의 2 부지를 매입하고, 여기에 10 명을 수용할 있는 주경기장과 보조 경기장, 야구장, 1·2 실내체육관과 정구장, 민속경기장 등을 포함한 종합운동장 건설을 추진했습니다. 설계는 당시 건축가협회 회장이었던 김수근이 맡았습니다.

<염보현 서울시장, 잠실 종합 운동장 공사 현장 시찰>,
서울특별시 공보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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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나 예산 등의 문제로 계획이 삐걱이면서 잠실야구장은 잠실종합운동장 건설 후순위로 밀려났습니다. 그러다 다시 잠실야구장 건설을 촉진시킨 계기는 27 세계야구선수권대회 개최였습니다. 당시 동대문야구장은 국제대회를 치르기에는 시설 노후화가 심한 상태라 개선이 필요하다는 의견이 많았습니다. 이를 수용해 1980 4 공사가  시작돼 1982 7 15일에 잠실야구장 완공에 이르렀습니다. 비록 1982 27 세계야구선수권대회로 인해 프로야구 개막식이 열리지는 못했지만, 잠실야구장은 한국 야구의 산실로 자리잡게 되었습니다. 1982 당시 서울 지역 구단이었던 MBC 청룡의 홈구장으로 이용됐고, 1986년부터는 동대문야구장을 잠시 사용했던 OB 베어스가 잠실야구장을 홈구장으로 사용하게 되면서 팀이 지붕 아래에 공존하게 되었습니다.

모래섬 잠실운동장의
배수 문제를 해결하라

개발이 이루어지기 잠실은 사실 모래섬이었습니다. 모래섬을 개발하기 위해 정부는 한강의 물을 막고, 하천을 땅으로 만드는 공유수면 매립공사를 진행해야 했습니다. 매립공사가 완료된 이후, 건물 건설 시에도 배수 문제는 항상 염려되는 사항이었습니다. ‘잠실종합운동장역시 마찬가지였습니다. ‘잠실종합운동장 건설 계획에서 실시계획 인가를 협의할 배수 문제는 중요한 논의 사항이었습니다.


도시계획사업(잠실종합운동장) 실시계획인가에 따른 협의기록 1977 당시 서울시 하수시설과장이 작성해 도시계획과장에게 보낸 문서는 배수 문제가 얼마나 중요한 문제였는지를 보여주고 있습니다.  

수신 : 도시계획과장  77.11.26

제목 : 도시계획사업(잠실 종합경기장) 실시 계획인가에 따른 협의의 회신

본건 내용 검토한 바 운동장시설과 인근 APT 및 주택이 완정될시를 감안한 종합운동장 내부 배수시설로 인하여 지형변동이 왓을것이므로 유출계수가 현재보다 약2배 증가가 예상되며 유달속도가 증가됨으로써 폭우시 일시적인 침수가 예상될수 있으며 이에 따른 기존하수시설물 관경의 크기와 인근 유수지 펌프장을 현재 펌프설치율 66%보다는 더 보강하여야 될것으로 사료되는바…(하략).

하수시설과장.

<도시계획사업(잠실종합운동장) 실시계획인가에 따른 협의>, 1977.,
서울특별시 도시계획국 도시행정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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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마추어 야구의 뿌리 지키는목동야구장

  • 소재지 : 서울특별시 양천구 
  • 존속 기간 : 1989 7 ~  
  • 활동 프로 구단 : 우리-서울-넥센 히어로즈 (2008~2015)

서울의 야구장을 이야기할 목동종합운동장 빼놓을 없습니다. 본래 1986 아시안게임과 1988 서울올림픽을 대비한 보조경기장으로 활용할 목적으로 계획되었다가, 이후 생활 체육의 저변 확대와 아마추어 스포츠의 활성화를 목표로 1987년에 조성되었습니다. 목동종합운동장에 포함돼 1989 개장한 목동야구장은 당시 프로야구의 인기가 절정에 달한 시기였음에도 불구하고 시작은 아마추어 야구 활성화에 초점을 맞추고 있었습니다. 특히 동대문운동장과 함께 서울의 고교야구와 대학야구 등을 개최하며 아마추어 야구의 양대 산맥으로 자리매김하였습니다.


2008년에는 지금은 해체된 프로야구 구단현대 유니콘스 선수들을 흡수해 창단된 신생팀히어로즈 목동야구장을 홈구장으로 사용하기 시작했습니다. 히어로즈는 스폰서 기업명 대신 지역명을 붙여서울 히어로즈라는 이름으로 창단했는데, 이로써 서울은 번째 프로야구 구단과 홈구장을 탄생시켰습니다. 이후 메인 스폰서를 유치하며 이름을 바꾼넥센 히어로즈고척스카이돔으로 홈구장을 옮기면서, 목동야구장은 다시 아마추어 야구 경기 전용 구장이라는 본래의 역할로 돌아갔습니다. 동대문운동장이 사라진 지금, 목동야구장은 아마추어 야구의 뿌리를 지키는 공간으로 남아 있습니다.
야구장  좌우 펜스 규정 미달 해프닝 

목동야구장의 설계가 완료된 뒤인 1987 6 24 야구장 기공식이 진행됐습니다. 그런데 이튿날인 6 25, 목동야구장의 설계에 문제가 있다는 언론 보도가 나왔습니다. 내용은 목동야구장의 좌우 펜스 거리가 92.4m 설계돼 프로야구 아마추어 야구 규격(이상형) 비해 5m 부족하다는 지적이었습니다. 야구장의 크기와 형태는 경기의 흐름에 영향을 미치는데, 특히 홈런 여부를 결정짓는 중앙 펜스와 좌우 펜스 거리는 매우 중요한 요소로 꼽힙니다. 때문에 설계상의 문제는 단순한 수치 차이가 아니라 야구 경기의 본질에 영향을 있는 예민한 이슈로 부상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언론 보도에 대해 목동야구장 건설을 추진한목동지구개발사업소 1987 6 30 서둘러 진화에 나섰는데, 내용은 대한야구협회 규칙에 저촉되지 않으며 동양인의 체형을 고려했기 때문에 오히려 경기의 박진감을 더한다는, 다소 이해하기 어려운 해명이었습니다.

사유 

국내야구협회규정은 미국규칙을 준용하고 사용하고 있으므로 각국 및 국내 경기장별 자료를 수집 검토 분석한 바, 미국경기장은 이상형과 비슷하나 일본 및 국내경기장(잠실구장제외)은 이상형에 대부분 미달임으로 야구협회 관계자의 자문을 받아 동양인의 체위적응 및 관객의 가시선을 좋게 하고 경기의 박진감을 고려한 결과 이상형에는 다소 미달되었음. 


결론 

목동 야구장의 규격은 대한야구협회의 규칙에 저촉되지 않으므로 국내외 모든 경기를 할 수 있음. 

이에 대한 체육계의 반발로 목동지구개발사업소는 1987 7 8 야구 관계 전문 체육인을 선정해 자문회의를 개최합니다. 자문회의에서는규정상으로 문제는 없으나, 앞으로의 추세를 감안하여 좌우 파울라인은 92.4m에서 98m 연장함이 바람직하다 결론을 내렸고, 목동지구개발사업소는 이를 받아들이기로 결정합니다. 재미있는 사실은 회의 결과 보고 문서의 마지막 대목입니다.

앞으로 발주할 주경기장, 실내체육관, 아이스링크장도 체육 전문인들의 자문을 받아 시행토로 하겠음.

현재 목동야구장은 자문회의 결과에 따라 좌우 펜스 라인이 98m 되어 있습니다. 연장된 길이만큼 펜스 라인을 남쪽으로 10m 이동 배치해 관람석의 수를 약간 줄였는데, 덕분에 현재는 파울존이 좁고 관중석과 그라운드의 거리가 가까워 야구를 관람하기에 좋은 환경을 갖추고 있다는 평을 받고 있으니 전화위복인 셈입니다.
 <목동 종합운동장 추진 경위>, 1987.6.30.,
서울특별시 목동지구개발사업소
¹한반도 최초의 야구시합이 펼쳐진 곳은 1896 모화관(조선시대 명나라와 청나라의 사신을 영접하던 ) 터로 기록된다. 당시 야구 시합이 주로 펼쳐지던 장소가 모화관 터에서 훈련원으로 바뀌게 시기와 사유를 담고 있는 사료는 현재까지 발견되지 않았다. (출처 : 김은식. 2018. 『서울의 야구장』, 서울역사편찬원. 18p.)
²김은식. 2018. 『서울의 야구장』, 서울역사편찬원. 18p.
³서효인. 2011. 『이게 야구 때문이다』. 다산책방. p.267.
1966 서울운동장 야구장 라이터 시설공사가 완공되어 박정희 대통령 임석하에 점등식이 거행되었다
손정목. 2003. 서울도시계획이야기, 한울. 244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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