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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의 도시성장과 환경기초시설

서울의 고도성장

서울은 6·25 전쟁을 거치면서 폐허가 되었으나 인구 1,000만명의 도시가 되기까지 반세기가 걸리지 않았다. 산업화 시기 전국적인 이촌향도 현상으로 서울의 인구 유입은 급속도로 진행되었다. 밀려오는 인구를 수용하기 위해 주택건설, 도시기반시설이 대대적으로 구축되었다. 6·25전쟁 직후 1955년 서울 인구는 157만여 명이었으나 고도성장기를 거치면서 1990년에는 1,061만여 명을 기록했다. 이 같은 인구급증으로 인구밀도는 5,869명/㎢에서 17,532명/㎢으로 증가하여 인구 과밀문제가 심화되었다.

인구과밀은 주택난과 삶의 질 하락 등 다양한 도시문제를 야기했고 시급히 해결해야 할 필요가 있었다. 그 해결방안으로 서울의 도시개발은 적극적으로 이뤄졌고, 이는 도시팽창으로 이어졌다. 이 시기 서울의 팽창과 변화 양상은 국토지리정보원에서 제공하는 시대별 지형도에서 살펴볼 수 있다. 일제강점기 경성부는 현재의 종로구, 중구, 용산구 중심으로 분포되어 있었다. 그러나 본격적인 서울 개발이 시작된 1960년대에는 기존 시가지와 더불어 마포구, 영등포구 일대를 중심을 확장했고, 양화대교(1966), 한남대교(1969)가 개통되면서 한강 이남으로 확대되었다.
1970년대에는 강남개발계획(1970), 여의도 개발계획(1971), 영동 및 잠실지구 개발계획(1973) 등 강남개발의 추진되면서 한강 이남을 중심으로 시가지가 대폭 확장되었다. 1980년대와 1990년대에는 도시의 수평적인 팽창이 둔화되면서 현재와 같은 모습으로 되었다.

  • 남한과 북한의 1인당 GDP(1950~2018)

    <남한과 북한의 1인당 GDP(1950~2018)>
    (출처: Maddison Project Database 2020)

  • 서울과 전국의 인구 및 인구밀도

    <서울과 전국의 인구 및 인구밀도>
    (출처: 인구주택총조사)

  • 서울시 일대 지형도(1918년, 1:50,000)

    <서울시 일대 지형도(1918년, 1:50,000)>
    (출처: 국토지리정보원)

  • 서울시 일대 지형도(1960년대, 1:250,000)

    <서울시 일대 지형도(1960년대, 1:250,000)>
    (출처: 국토지리정보원)

  • 서울시 일대 지형도(1970년대, 1:250,000)

    <서울시 일대 지형도(1970년대, 1:250,000)>
    (출처: 국토지리정보원)

  • 서울시 일대 지형도(1980년대, 1:250,000)

    <서울시 일대 지형도(1980년대, 1:250,000)>
    (출처: 국토지리정보원)

  • 서울시 일대 지형도(1990년대, 1:250,000)

    <서울시 일대 지형도(1990년대, 1:250,000)>
    (출처: 국토지리정보원)

고도성장의 그 이면

도시의 급격한 성장은 서울이 대도시로 발돋움하는 토대가 되었으나, 그 이면에는 각종 도시문제가 야기되기도 하였다. 특히 물을 중심으로 수해, 전염병 확산, 기생충 감염, 수질오염이 두드러졌다. 인구과밀로 수해에 취약한 지역에 더욱 많은 이들이 거주하였고, 미비한 상하수도 시설로 전염병과 기생충 감염에 쉽게 노출되었다. 또한 적절히 처리되지 못한 오·폐수는 수질오염을 야기했으며 이러한 문제는 서울 시민의 건강과 안전을 위협하는 문제로 대두되었다.

수해

서울시 직원들이 이천동 수해지구를 시찰하고 있다.

이천동 수해지구

<이천동 수해지구>
(출처: 서울기록원)

수질오염

서울의 급속한 팽창 속도에 맞추어 환경시설이 충분히 구축되지 못하였다. 그 결과 한강의 수질이 심각하게 악화되었고, 각종 용수 공급에 차질을 빚었다.

‘산업화·인구집중의 부산물 한강 수질오염’(1971.11.9.)

<‘산업화·인구집중의 부산물 한강 수질오염’(1971.11.9.)>
(출처: 경향신문)

전염병 및 기생충 감염

서울시는 장마 후 질병을 예방하고자 장마 방역 기간을 정하고 변두리부터 전염병 발생 예상 지역을 소독하였다. 우물 소독, 청소작업 등이 그 예이다. 또한 상하수도 시설을 본격적으로 갖추기 이전에는 인분으로 만든 퇴비를 비료로 사용하고 있어서, 전 국민의 95%가 기생충에 감염되는 등 기생충 감염 문제가 심각했다. (참조: 「경향신문」 1969.8.12.)

  • 장마 후 방역(1969.8.12.)

    <장마 후 방역(1969.8.12.)>
    (출처: 서울기록원)

  • 전국민의 95% 기생충 감염자’

    <‘전국민의 95% 기생충 감염자’(1965.3.31.)>
    (출처: 경향신문)

제1차 한강종합개발(1968~1979)

급격한 도시성장의 폐해는 서울의 지속적인 성장에 걸림돌이 되었다. 이를 해결하기 위해서는 환경 기초시설 등 도시기반시설을 대대적으로 구축할 필요가 있었다. 1968년~1979년 사이에 추진된 제1차 한강종합개발은 서울의 도시기반시설 구축에 중요한 계기가 되었다. 제1차 한강종합개발은 소위 ‘불도저 시장’으로 불리는 김현옥 시장(1966~1970)의 재임기에 시작되었다. ‘돌격 건설’이라는 당시의 시정 구호에 맞게 한강개발 3개년 계획을 수립하였고, 강변도로 건설, 공유수면 매립, 잠실과 여의도 개발을 추진하였다. 이 과정에서 서울의 공간은 대대적으로 변모하였다.

한강건설현황 및 사업계획 종합도(1968.2.24.)

<한강건설현황 및 사업계획 종합도(1968.2.24.)>

한강개발사업소가 작성한 강변도로 및 교각위치와 현황을 표기한 「한강건설현황 및 사업계획 종합도」이다. 한강을 도시의 중심 생활권으로 들여와 최대한 이용하자는 목표를 제시하고 있다. (출처: 서울역사아카이브)

강변도로 건설

  • 강변 2로 개통된 모습

    <강변 2로 개통(1968.6.27.)>

    강변 2로가 개통된 모습이다.
    (출처: 서울역사아카이브)

  • 강변 4로 기공식(1968.8.10.)

    <강변 4로 기공식(1968.8.10.)>

    강변 4로 기공식 기념행사에 김현옥 서울시장과 차일석 부시장이 첫 삽을 뜨고 있다. 시비 6억여 원을 들여 제1한강교부터 서빙고~한남동~행당교에 이르는, 길이 9.6km, 폭 25m, 6차선 규모의 도로공사를 시작하였다.
    (출처: 서울역사아카이브)

  • 강변 4로 기공식-천주교 절두산 순교성지 일대(1968.8.10.)

    <강변 4로 기공식-천주교 절두산 순교성지 일대(1968.8.10.)>

    1967년 12월 30일 착공한 강변 2로의 공사 현장이다. 강변 2로는 여의도 입구에서 제2한강교 부근까지 총 2.37km, 폭 20m, 유료 도로로 계획되었으며 총 3억 4,900만원의 공사비가 소요되었다. 왼쪽 절벽 위 건물은 천주교 절두산 성지이다. (출처: 서울역사아카이브)

잠실개발

  • 잠실섬이 육지가 되는 순간(1971.4.16.)

    <잠실섬이 육지가 되는 순간(1971.4.16.)>

    잠실지구 개발공사를 벌인지 45일 만인 1971년 4월 16일, 서울 성동구 잠실도와 송파 사이에 흐르던 한강의 지류가 막혀, 서울의 옛 섬인 잠실섬이 육지로 변했다.
    (출처: 서울역사아카이브)

  • 잠실지구 종합개발계획 모형(1970.5.8.)

    <잠실지구 종합개발계획 모형(1970.5.8.)>

    서울시는 한강 하류의 모래섬이었던 잠실섬을 육속화시켜 광범위한 면적의 땅을 마련하고, 여기에 새로운 시가지와 국제적으로도 손색이 없는 종합체육시설을 건립하겠다는 계획을 세웠다. (출처: 서울역사아카이브)

여의도개발

  • 밤섬 폭파 장면(1968.2.10.)

    <밤섬 폭파 장면(1968.2.10.)>

    윤중제 제3공구 밤섬 폭파 행사에 참가한 김현옥 시장의 모습이다. 한강개발과 여의도 건설의 일환으로 한강의 하폭을 넓히기 위해 총면적 17,393평에 달하는 밤섬을 폭파하였다. (출처: 서울역사아카이브)

  • 여의도 종합개발계획 모형(1968.3.8.)

    <여의도 종합개발계획 모형(1968.3.8.)>

    여의도 종합개발계획 모형을 보면, 서울교와 현재의 마포대교를 중심축으로 여의도를 양분하고, 구역별로 건물 모형이 들어선 것을 볼 수 있다. 모형 뒤쪽에는 여의도 매립공사와 관련한 구역별 면적을 기재한 계획도가 있다. (출처: 서울역사아카이브)

  • 여의도 윤중제 공사현장 및 표어(1968.5.31.)

    <여의도 윤중제 공사현장 및 표어(1968.5.31.)>

    윤중제 위 설치된 입간판에는 “서울은 싸우면서 건설한다.”가 쓰여있다.
    (출처: 서울역사아카이브)

  • 여의도 시범아파트 전경(1971.10.19.)

    <여의도 시범아파트 전경(1971.10.19.)>

    1971년 10월 29일 박정희 대통령, 양택식 서울시장이 참석한 가운데 여의도 시범아파트(12층 건물, 24개 동) 준공식이 열렸다. 여의도 시범아파트 건립에는 60억여 원의 예산이 투입되었다. 현대식 고급 아파트로 한국 최초로 지하 공동구 건설을 통해 난방과 냉온수가 공급되고, 전기, 전화 등을 설치하였다. 아파트 내부에는 12인승 엘리베이터 24대와 에스컬레이터 2대를 설치하였다. (출처: 서울역사아카이브)

제2차 한강종합개발(1982~1986)

제2차 한강종합개발은 1986년 아시안게임과 1988년 서울 올림픽을 계기로 국가적 역량을 총동원하여 추진하였다. 이 시기 한강변 정비, 저수로 정비, 시민공원 조성, 올림픽대로 건설, 하수관로 및 하수처리장 건설, 수중보 건설 등의 사업을 추진하였다.
제2차 한강종합개발은 강동구 암사동에서 행주대교까지 총 36km 구간에 걸쳐 연인원 420만여 명과 100만여 대의 장비를 동원하여 1982년 9월 ~ 1986년 9월까지 약 4년여간 진행되었다. 총사업비는 9,560억여 원이다. 이 사업으로 한강의 강폭은 넓고 깊이가 일정한 지금의 모습을 갖추었다.

  • 제2차 한강종합개발사업 기공식(1982)

    <제2차 한강종합개발사업 기공식(1982)>

    1982년 서울시는 한강종합개발사업의 10개 공구 중 미착공한 8개 공구 기공식을 여의도 둔치에서 거행하였다. 8개 공구가 같은 날 일제히 착공하였고, 김포대교 ~ 강동구 암사동까지 10개 공구가 본격적으로 공사를 시작하였다. (출처: 서울기록원)

  • 제2차 한강종합개발계획 기공식(1982)

    <제2차 한강종합개발계획 기공식(1982)>

    김포대교와 강동구 암사동간 36km 구간에 걸쳐 진행되는 한강종합개발 사업 기공식이 열렸다. 한강종합개발 사업은 저수로 조성, 둔치 개발, 강변도로 확장, 하수처리장 처리능력 확장 등으로 추진되었다. (출처: 서울기록원)

  • 제2차 한강종합개발계획 개요(1982)

    <제2차 한강종합개발계획 개요(1982)>

    당시 대한늬우스에에 36km 구간의 저수로 정비, 체육공원과 유원지를 포함한 210만여 평의 고수부지 조성, 강변도로 건설 등 제2차 한강종합개발계획의 개요를 소개하고 있다.
    (출처: 국가기록원)

  • 한강종합개발사업계획도(1986.5.1.)

    <한강종합개발사업계획도(1986.5.1.)>

    1986년 5월 1일에 보고되었던 제18회 한강종합개발 추진상황에 수록된 계획 도면이다. 한강종합개발 사업내용이 구체적으로 담겨있다. (출처: 국가기록원)

  • 한강종합개발 추진상황(1986.8.27.)

    <한강종합개발 추진상황(1986.8.27.)>

    「한강종합개발 추진상황」에 수록된 사업개요이다. 저수로 정비, 고수부지 조성, 올림픽대로 건설, 분류식 하수관거 공사 등 주요 사업별로 정리되어 있다.
    (출처: 국가기록원)

  • 한강종합개발 준공식(1986.9.10.)

    <한강종합개발 준공식(1986.9.10.)>

    한강종합개발 준공식이 1986년 9월 10일 여의도 둔치에서 열렸다. 전두환 대통령과 노태우 민정당 대표위원, 염보현 서울시장 등 각계 대표 시민 등 1만여 명이 참석하였다.
    (출처: 서울기록원)

한강변 정비

  • 정비된 한강 둔치(1986.5.16.)

    <정비된 한강 둔치(1986.5.16.)>

    정비된 한강 둔치에서 시민들이 낚시를 즐기고 있다.
    (출처: 서울역사아카이브)

  • 한강 둔치 잠원지구(1986.9.)

    <한강 둔치 잠원지구(1986.9.)>

    한강 둔치 잠원지구의 모습이다. 뒤편에 남산타워가 보인다.
    (출처: 서울역사아카이브)

저수로 정비

  • 한강종합개발 모리보트 진수식(1983)

    <한강종합개발 모리보트 진수식(1983)>

    1983년 서울시가 건조한 다목적 순시선인 한강 1호와 2호가 1983년 5월 13일 중지도에서 진수되었다. 개발 기간 중 저수로 굴착상태를 확인하고, 기타 하천공사를 지휘·감독하는데 사용할 예정이었다. 한강 개발이 끝난 후엔 한강의 인명구조에 활용될 예정이다. 2척의 순시선은 4개월에 걸쳐 건조되었다. (참조: 동아일보, 1983.5.13.)
    (출처: 서울기록원)

  • 한강 유람선(1987.5.16.)

    <한강 유람선(1987.5.16.)>

    한강종합개발로 저수로 정비가 이뤄짐에 따라 한강유람선 운항이 가능하게 되었다. 한강유람선은 1986년 10월 정식 운항을 시작하였다. 선착장은 여의도 63빌딩 앞 둔치와 잠실 주경기장 앞 둔치에 설치하였으며, 여의도~잠실 간 15km의 직선코스와 여의도~한강철교~당산철교~여의도, 잠실~동호대교~잠실간 회항코스를 운영하였다.
    (출처: 서울역사아카이브)

  • 올림픽대로 건설

    강남로 확장 및 입체교차로 건설(1983)

    <강남로 확장 및 입체교차로 건설(1983)>

    1983년 6월 13일 서울시는 한강종합개발사업 중 하나인 강남로 확장과 입체교차로 시설 기본계획을 확정하였다. 여의도 상·하류를 비롯한 6곳에 입체교차 시설을 새로 만들었고, 7개 교량의 기존 입체 교차시설은 도로 확장 및 통행 흐름에 맞게 개량했다.
    (참조: 경향신문, 1983.6.13., 출처: 서울기록원)

  • 수증보 건설

    잠실 수중보 건설 기공식(19684.12.26.)

    <잠실 수중보 건설 기공식(19684.12.26.)>

    잠실 수중보 건설 기공식 현장이다. 잠실 수중보는 한강의 수위 저하를 막고, 수위를 일정하게 유지하기 위해 잠실대교 아래에 낮은 댐 형태로 설치한 구조물이다. 이 공사로 유림선이 안정적으로 운행할 수 있게 되었다. (출처: 서울역사아카이브)

  • 시민공원 조성

    여의도 한강 둔치 시민공원 건설공사(1985.5.21.)

    <여의도 한강 둔치 시민공원 건설공사(1985.5.21.)>

    여의도 한강 둔치에 체육공원을 건설하는 모습이다. 한강종합개발의 일환으로 광나루에서 개화동 나루터 사이 한강 양안 13개 둔치에 체육공원을 건설하였다. 각 지구에는 야구장, 축구장, 농구장, 배구장 등 체육시설과 잔디가 조성되었다.
    (출처: 서울역사아카이브)

  • 분류식 하수관로 및 하수처리장 건설

    한강종합개발 잠실지구 공사현장(1986.1.24.)

    <한강종합개발 잠실지구 공사현장(1986.1.24.)>

    한강종합개발 잠실지구 공사 현장이다. 한강 양측을 잇는 교량으로 잠실대교, 잠실철교, 천호대교, 광진교가 차례로 보인다. 한강변을 따라서는 정비 중인 잠실지구, 광나루지구, 한강 둔치 체육공원과 분류 하수관로 건설 현장이 보인다. (출처: 서울역사아카이브)

상하수도 보급

서울의 상수도 보급은 1960년대부터, 하수도 보급은 1970년대부터 개선되었다. 상하수도 보급률은 1990년대에 들어 100% 달성하였다. 서울의 한강 본류와 지천이 정비되고, 하수도 공사 등 도시의 배수환경이 개선되면서 수해로 인한 피해가 감소하였다.

  • 상하수도 보급률(1950~2020)

    <상하수도 보급률(1950~2020)>
    (출처: 서울연구원)

  • 서울특별시 수해(태풍, 장마, 홍수) 통계

    <서울특별시 수해(태풍, 장마, 홍수) 통계>
    (출처: 국가수자원관리종합정보시스템(WAMIS))

상수도

서울의 근대적 상수도는 1908년에 건설된 뚝도 정수장에서 시작하였다, 일제강점기와 6·25전쟁을 겪으면서 상수도 보급률은 확대되지 못하였으나 1960년대 이후로 산업화가 진행되면서 정수장, 송배수관이 확충되었다. 1970년대에 들어서면서 서울의 상수도 보급률은 90%에 달했고, 1990년대에는 100% 달성했다.

  • 서울시 상하수도시설 AID 차관 조인식(1966)

    <서울시 상하수도시설 AID 차관 조인식(1966)>
    AID 차관은 서울 상하수도 시설을 확충하는데 도움이 되었다. (출처: 국가기록원)

  • 서울시 상수도 공사현장(1976)

    <서울시 상수도 공사현장(1976)>
    서울시 상수도 공사 현장 모습이다. (출처: 국가기록원)

  • 송수관 시설공사 현장(1978.1.17.)

    <송수관 시설공사 현장(1978.1.17.)>
    서울시 송수관 시설공사 현장 모습이다. (출처: 서울기록원)

  • 뚝도(뚝섬) 보광동 통합취수장 이설공사(1984.12.)

    <뚝도(뚝섬) 보광동 통합취수장 이설공사(1984.12.)>

    1984년 12월 염보현 서울시장이 참석한 가운데 뚝도(뚝섬), 보광동 통합 취수장 이설공사 기공식이 열렸다. (출처: 서울기록원)

하수도

하수도 설치

  • 하수도 공사(1963.5.3.)

    <하수도 공사(1963.5.3.)>
    1963년 5월 후암동 하수도 공사 현장이다. (출처: 서울기록원)

  • 부 위생처리장 준공식(1975.3.20.)

    <북부 위생처리장 준공식(1975.3.20.)>

    구자춘 서울시장이 북부 위생처리장 준공식에 참석하고 있다. 경기도 고양군 원당면 도내리에 설치한 북부 위생처리장은 분뇨의 위생적인 처리로 한강 수질오염 방지와 생활개선에 도움이 되었다. (참조: 경향신문, 1975.3.21., 출처: 서울기록원)

  • 청계천 하수처리장 조감도(1976.9.21.)

    <청계천 하수처리장 조감도(1976.9.21.)>

    청계천의 오염된 하수를 정화시킬 하수처리장의 조감도이다. 청계천 하수처리장은 성동구 군자동에 완공되었고, 최규하 국무총리, 구자춘 서울시장 등이 참석한 가운데 준공식이 열렸다.(참조: 동아일보, 1976.9.21., 출처: 서울기록원)

  • 청계천 하수처리장 준공(1976.9.21.)

    <청계천 하수처리장 준공(1976.9.21.)>
    준공된 청계천 하수처리장을 서울시 관계자들이 시찰하고 있다. (출처: 서울기록원)

  • 2030 하수도 정비 기본계획 차집관로 및 간선관로

    <2030 하수도 정비 기본계획 차집관로 및 간선관로 현황>
    2018년 서울의 하수도 차집관로 및 간선관로 현황이다. (출처: 서울특별시)

* 성숙한 도시성장의 방향을 청계천 사업을 통해 살펴보고자 한다

청계천 복개사업(1958~1978)

청계천 복개공사는 구간을 나누어 1958년~1978년 사이에 본격적으로 추진되었다. 청계천 복개공사는 고가도로 건설과 함께 진행되었고, 그에 따라 기존의 청계천 자리에는 복개도로와 고가도로가 이중으로 지나가게 되었다. 청계천 복개사업과 복원사업은 도시의 수변공간에 대한 사람들의 인식이 시대에 따라 어떻게 변해갔는지 그 모습을 분명하게 드러냈다. 과거 청계천은 수해와 악취의 진원지였고, 무허가 판잣집에서 살아가는 도시빈민 집단의 거주지였다. 결국 청계천은 복개공사로 도로로 덮였고 청계천 주변의 판잣집은 철거되었으며, 거주민들은 서울 외곽으로 강제 이주하였다.

조선시대 청계천과 그 지류

<조선시대 청계천과 그 지류>

조선시대 청계천과 지류를 상세히 나타낸 지도이다. 한양 도성을 청계천 본류가 동서로 관통하고, 지류는 도성 전역에 뻗어 있는 것을 살펴볼 수 있다.
(출처: 서울역사편찬원 「서울2천년사」)

  • 청계천변 판잣집(1962)

    <청계천변 판잣집(1962)>

    청계천 복개공사가 진행되기 전의 청계천변 모습이다. 하천 범람의 영향을 덜 받기 위해 나무 기둥 위로 판잣집이 들어선 것을 볼 수 있다. (출처: 서울역사편찬원)

  • 청계천 복개공사(1965)

    <청계천 복개공사(1965)>

    복개공사가 한창인 청계천 모습이다. 도로를 지탱하기 위한 구조물이 들어선 것을 볼 수 있다. 건설자재 위에서 아이들이 놀고 있다. (출처: 국가기록원)

  • 청계천 복개사업계획서(1967)

    <청계천 복개사업계획서(1967)>

    1967년 서울특별시 건설국에서 작성한 청계천 복개사업 계획서이다. (출처: 국가기록원)

  • 청계천 복원사업(2003~2005)

    1990년대에 들어서면서 청계천 복개 구조물과 청계 고가도로의 안전문제를 우려하는 목소리가 높아졌다. 이에 서울시는 2003년 청계 고가도로 철거를 기점으로 2005년까지 청계천 복원사업을 마무리하였다. 청계천 복원사업은 서울의 상하수도 공급이 완료되고, 수변공간에 대한 인식이 전환되는 시점에 추진되었다. 이러한 토대 위에 청계천 복원사업이 완료되면서 청계천은 과거의 부정적인 이미지를 탈피하고, 서울을 대표하는 휴식 공간으로 거듭났다.

    • 청계천 복원공사(2005)

      <청계천 복원공사(2005)>
      청계 고가도로와 도로 상부 일부가 철거되는 모습이다.
      (출처: 서울시연구데이터서비스)

    • 청계천 복원사업 구간(2007)

      <청계천 복원사업 구간(2007)>
      청계천 복원사업의 공간적 범위와 주변 지역을 나타내고 있다.
      (출처: 서울시정개발연구원)

    • 청계천 주변지역 관리지침(2007)

      <청계천 주변지역 관리지침(2007)>
      청계천 복원사업 구간과 주변 지역의 관리 방안에 대한 세부 지침을 정리한 도면이다.
      (출처: 서울시정개발연구원)

    • 청계천을 찾은 시민들(2009.5.)

      <청계천을 찾은 시민들(2009.5.)>
      청계천 복원사업이 완료된 후, 청계천은 시민들의 휴식 공간으로 변모하였다.
      (출처: 서울역사편찬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