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울에는 한강과 중랑천, 안양천 등의 국가 하천과 탄천, 도림천 등 지방 하천을 합해 총 61개의 하천이 있습니다. 자치구 전역에 분포되어 있는 하천은 빨래터와 놀이터, 만남의 장소로 이용되는 일상 공간 중 하나이지만, 1960년대부터 도시화와 산업화로 인해 하천 생태계는 파괴되는 일이 빈번했습니다.
국가 하천으로 서울의 도봉구·노원구·성북구·중랑구·동대문구·성동구 등 6개 구를 걸쳐 흐르는 중랑천 역시 마찬가지였습니다. 멸종위기 파충류인 표범장지뱀, 양서류 맹꽁이가 서식하는 중랑천도 1970년대에는 오염이 심한 탁류 하천이었습니다. 역류, 상습 범람까지 비일비재하게 일어났던 중랑천이 오늘날의 생태 하천으로 거듭나기까지 변화를 기록으로 볼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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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랑천은 경기도 양주시 불국산에서 발원해 의정부시와 서울 북동부 일대를 거쳐 한강과 합류하는 하천입니다. 서울을 대표하는 하천 중 하나로, 지류가 많아 부르는 명칭이 다양했습니다. 상계동 부근에서는 한강의 새끼 강이라는 의미로 ‘샛강’이라 불렸고, 한강 위쪽에 흐르는 냇물이라는 뜻으로 ‘한천(漢川)’ 또는 ‘한내’라고도 불렸습니다. 도봉동 부근에서는 도봉서원에서 내려온다 하여 ‘서원천(書院川)’으로 불렀습니다. 오늘날 지명인 중랑천은 하천의 지류인 우이천과 묵동천이 합류되는 지점이 큰 바닷가 같다 하여 이를 중랑포(中梁浦, 中良浦) 또는 충랑포(忠浪浦) 혹은 중랑포(中浪浦)라고 부른 것에 어원을 두고 있습니다.¹
조선시대의 기록인 『동국여지승람』, 『신증동국여지승람』도 중랑포(천)를 각기 ‘중량포(천)(中梁浦(川))'으로 기록하고 있습니다. 하지만 『조선왕조실록』에서는 중량(中良)과 중량(中梁)을 혼용하여 썼고, 조선 후기에는 중랑포(中浪浦)가 혼용하여 쓰이다가 점차 중랑으로 자리 잡았습니다.² 과거 등기부나 일반 지도에는 중랑과 중량이 혼용되어 쓰였고, 중랑(中郎)으로 정한 이후에도 한글 표기를 중량, 중랑, 중낭으로 할 지 혼동스러운 시기가 있었습니다. 현재는 중랑천으로 정리되었지만, 1980년대 행정문서만 해도 중량천으로 표기된 문건을 쉽게 찾을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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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랑천을 가로지르는 여러 개의 다리 중 현존하는 가장 오래된 다리는 성동구 행당동 일대에 남아있는 살곶이 다리입니다. 2011년 12월 23일 보물 제1738호로 지정된 살곶이 다리는 조선시대에 지어진 가장 긴 다리로, 현재는 보행교로 남아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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석관동과 태릉을 연결하는 월릉교는 1945년 10월 준공됐습니다. 월릉교 가까이에 있는 중랑교는 일찍이 조선시대 왕들이 동남부 지역으로 행차할 때 주로 이용하던 교통로였습니다. 중랑교로 명칭이 바뀌기 전에는 속계교(速溪橋) 혹은 송계교(松溪橋)로 불렸고, 고려시대 때 나무로 만든 다리였다가 1934년 돌로 개축되었습니다. 1966년 4월에 진행된 중랑교 기공식 현장과 이후 중랑교의 가설공사 및 도로공사 현장이 사진으로 남아 당시 모습을 전하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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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커먼 중량천. 거기 다닥다닥 붙어있는 판잣집들…. 심한 악취가 풍겨온다. 파리 모기 온갖 불결한 것들이 모여있는 메머드 쓰레기통이다.” (이○○ ○○여중 교사 주부칼럼 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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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부 지역 토박이라면 누구나 중랑천에서 멱을 감고 고기 잡던 추억이 있다’는 말도 1950년대에는 옛말이었습니다. 1950년대 강북구와 동대문구 일대에 판자촌이 형성되고, 공장이 생겨나면서 생활 폐수와 공장 폐수가 그대로 중랑천으로 흘러 들어갔습니다. 게다가 장마철마다 집중호우로 자주 범람했던 중랑천은 1958년 뚝도 제방 호안공사를 시작으로 지속적으로 제방 축조 및 낙차공 시설 등 정비가 이뤄졌습니다.
중랑천은 유속이 느리고 수량이 많지 않은데다 하천 곳곳에 모래톱이 작은 섬처럼 떠 있어 ’다사강(多沙江)‘이라고도 불렸습니다.³ 1970년대 성북구청은 중랑천의 토사를 업자들에게 채취하도록 허가했는데, 당시 업자들이 하천둑 바로 밑까지 토사를 파내 주민들이 둑이 무너질까 걱정이 이만저만이 아니었습니다.⁴ 민원이 늘자 성북구는 서울시에 ’중랑천 토사 채취 중지 요청‘ 공문을 보내 단속을 요청하기도 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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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70년대부터는 더욱 급격해진 산업화와 도심화로 하천뿐 아니라 한강 오염 문제까지 이슈가 되었습니다. 이에 정부는 1976년 최초의 도시 하수종말처리장인 청계천하수처리장 건설에 이어 1979년 중랑하수처리장을 마련해 하수처리 시스템을 구축했습니다. 중랑물재생센터로 명칭이 바뀐 중랑하수처리장은 오늘날까지 종로에서 노원에 이르는 동북부 10개 구와 의정부시 일부 하수를 처리하고 있습니다.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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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제적인 행사를 본격적으로 유치하게 된 1980년대 서울시는 낙후 주거지 재개발을 본격적으로 추진했습니다. 서울시는 1985년 ‘동북부 지역 신시가지 개발계획’을 발표하는데, 비닐하우스나 시멘트블록 공장이 위치하고 960여 동의 무허가 주택이 밀집된 중랑천변 등을 개발이 시급한 대상 지역에 포함했습니다.⁶ 이 소식에 상계와 하계, 중계동의 땅값이 들썩이면서 부동산 열기를 높아진 한편 중랑천변의 불량 주택 지역 주민들은 살집이 헐리고 토지가 수용될 것에 대한 우려가 컸습니다. 각 동마다 2~3가구씩 세를 놓고 있던 중랑천변 주민들은 개발로 인해 철거될 경우 전셋값을 내주기 힘겹다며 대책 마련을 호소하기도 했습니다.⁷
개발이 본격적으로 추진되면서 중랑천에 인공 제방이 지어지고, 하천 구역이 정리됐습니다. 이 무렵 주민들은 토지 보상 문제로 서울시에 적극적으로 민원을 제기합니다. 남아있는 민원기록에는 수기로 작성한 민원 내용과 우편봉투, 해당 지역의 지도, 서울시에서 회신한 내용이 담겨 있습니다. 우편으로 주고받은 민원은 2회 이상 이어지기도 했습니다. 서울시의 회신 문서마다 적혀진 ‘화합으로 맞은 손님 웃으면서 돌아간다’라는 문구도 눈에 띕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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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90년대 말, 서울시는 ‘중랑천 되살리기 범시민운동’을 전개하는 등 중랑천 정화 사업을 펼쳐나갔습니다. 2000년 중랑천에서 물고기가 집단 폐사하는 일이 발생하자 <중랑천 물고기 집단폐사 원인 및 수질개선 방안>도 논의됐습니다. 보고서에 따르면 물고기 떼죽음은 오랜 가뭄 이후 폭우성 강우로 인해 오염 물질이 하천으로 유입되었고, 토사 유출을 막기 위해 설치된 낙차공이 수질 악화를 가속화시켰다고 결론지었습니다.
이에 대책으로 낙차공 정비, 정체 수역을 제거하는 방안이 제시됐고, 이를 바탕으로 2001년 <중랑천 수질보전 종합대책>이 마련됐습니다. 오염과 홍수 피해 없는 중랑천을 위해 다양한 연구와 정책을 이어가던 서울시는 2000년대 들어 점차 중랑천의 환경을 개선하고 생태계를 복원하는 내용으로 사업 범위를 확대해 나갔습니다. ‘홍수로부터 안전한 녹색 생태 복원’은 현재까지도 중랑천 환경개선사업의 주요 기조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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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랑천 수질개선방안 연구과제별 추진계획 제출>, 2000.12.8., 서울특별시 건설기획국 치수과
[기록물 자세히 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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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랑천 환경정화운동>, 비디오(영상시간 5:51), 1997.6.14., 서울특별시 언론담당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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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랑천 복원사업(지하도로 설치>, 2006.11., 서울특별시 건설기획국 치수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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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6년 중랑천변에 지하도로 설치안이 마련되고, 시민들의 접근성을 높인 산책로와 자전거 도로가 깔렸습니다. 중랑천과 인접한 중랑구와 경기도 의정부시 등 8개 자치단체장으로 구성된 ‘중랑천생태하천협의회’가 만들어지고, 2013년에는 2020년 시행을 목표로 <물놀이가 가능한 중랑천 생태복원을 위한 기본계획 수립 용역결과>가 발표됐습니다. 중랑천 구간에 물놀이 체험 공간과 체육시설을 비롯해 채소를 가꿀 수 있는 텃밭, 친환경 낚시터 등을 조성하는 구상이 포함됐습니다. 오늘날의 중랑천 풍경은 이런 노력의 결과입니다.
중랑천의 수질이 개선되면서 터전을 잃었던 생물들이 돌아오기도 했지만 계속된 개발로 서식하던 철새들의 은신처가 손상되고 먹이 자원이 손실되는 일도 이어졌습니다. 이에 서울시는 환경단체와 협력해 철새보호구역 보호를 강화하고 생태계 변화를 모니터링 해나가고 있습니다. 2016년 노원구에는 하천 환경 교육 센터인 ‘중랑천환경센터’를 건립해 시민들이 상시적으로 하천 생태계를 관찰하고 체험할 수 있는 교육 프로그램을 제공하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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