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나라 최초의 공식적인 광장이며, 서울을 대표하는 광장인 ‘서울광장’. 이번 포스트에서는 서울광장의 기원부터 축조에 이르기까지 관련된 기록을 통해 살펴보고자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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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광장의 기원은 대한제국의 황궁인 경운궁(덕수궁) 동측에 1898년 대안문(대한문)을 세우고 그 앞 공터를 황도의 중심 공간으로 삼으면서 시작되었습니다. 이 공간의 형성배경에는 1896년 9월 내부령 제9호 〈한성내 도로의 폭을 규정하는 건〉에 근간을 둔 한성부 도시개조사업이 있었습니다. 기존의 간선도로인 종로와 남대문로를 정비하고, 아관파천 했던 고종이 환어할 경운궁을 중심으로 방사선 가로망과 광장을 신설하는 계획이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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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경성전도, 1903. ‣ 당시 계획한 규모로 추진되었는지 확실히 알 수 없지만, 1903년의 지도를 통해 황토현-청계천 신교(新橋)-경운궁 북쪽으로 이어지는 도로와 대안문에서 원구단(환구단)으로 이어지는 도로가 신설되었음을 확인할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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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격적인 광장의 형성은 한일병합조약 2년 후인 1912년 총독부에서 발표한 47개 노선의 경성시구개수 예정계획으로 이루어졌습니다. 광화문-황토현-대한문-남대문(숭례문)-경성역(서울역)까지 이어지는 도로개설을 위해 덕수궁 동측 궁역을 철거하여 넓은 직선도로인 태평통(세종대로)을 내었습니다. 그리고 태평통과 황금정통(을지로)을 수직으로 연결함으로써, 대한문 앞으로 태평통, 황금정통, 장곡천정(소공로)이 교차하는 삼각형의 교차로가 형성되었습니다. 이 교차로는 ‘대한문앞광장[大漢門前廣場]’이라고 불렸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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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성시구개수예정계획노선도, 1912.11.06. ‣ 이 사업은 1913년 시작되어 1915년에 마무리되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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第三 : 黄土峴廣場ヨリ大漢門前廣場ヲ經テ南大門ニ至ル路線 : 幅員十五間
제3 : 황토현광장에서 대한문앞광장을 지나 남대문에 이르는 노선 : 폭원 15간(27.3m)
第八 : 大漢門前廣場ヨリ黄金町ヲ直通シ光煕門外ニ至ル路線 : 幅員十二間
제8 : 대한문앞광장에서 황금정을 직통해 광희문밖에 이르는 노선 : 폭원12간(21.84m)
第十四 : 大漢門前廣場ヨリ朝鮮銀行前廣場ニ至ル路線 : 幅員十間
제14 : 대한문앞광장에서 조선은행앞광장에 이르는 노선 : 폭원10간(18.2m)
第十八 : 大漢門前廣場ヨリ西小門通ヲ經テ獨立門道ニ至ル路線 : 幅員八間
제18 : 대한문앞광장에서 서소문통을 지나 독립문길에 이르는 노선 : 폭원8간(14.56m)
*1間 = 1.82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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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한문앞광장이 도시의 중심[都心]이자 상징이 된 것은 1926년 서울시청의 전신인 경성부청이 광장 북측에 자리 잡으면서입니다. 경성역과 조선총독부의 중간 지점에 입지한 경성부청은 부청이 도시의 중심이어야 한다는 시빅센터 개념을 중요시하였습니다. 그리하여 1936년 부청 앞 사방으로 관통하는 교통의 요지이자 공공집회의 장소였던 대한문앞광장(21,000㎡)도 ‘광장’으로 공식 지정되었습니다. 이때 지정문서를 보면 ‘태평통2정목(부청앞)[太平通二丁目(府廳前)]’으로 쓰고 있어, 덕수궁에서 부청을 중심으로 광장의 명칭이 바뀌었음을 알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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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총독부 고시 제722호, 1936.12.26. (국립중앙도서관 소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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광복 이후 ‘시청앞광장’이라는 명칭 변화 외에 현 상태를 유지해 오다가 1952년 3월 25일 내무부 고시 제23호로 면적 28,800㎡로 확장해 변경 결정하여 고시하였고, 다시 1963년 7월 1일 건설부 고시 제431호로 28,000㎡ 확정 고시하였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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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특별시도시계획 광장계획도에 의한 광장지적고시도, 1953.01.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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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러한 광장계획에 의거하여 광장 경계부는 각기 다른 시기와 배경으로 형성되었습니다. 먼저 광장 동측은 을지로와 소공로를 잇는 도로를 확장하기 위해 1956년부터 그 주변의 토지와 건물 등을 매수하였습니다. 도로가 확장되며 분리된 당시 몇 채의 건물과 주로 나무가 심겨 있었던 용지도 광장에 포함되어 교통섬이 되었습니다. 이로써 삼각교차로에서 사각 형태의 교통광장으로 변화하였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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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청앞광장도로공사, 1956.06.13. ‣ 광장 동측 도로 확장 공사를 위해 매수할 용지를 표시한 도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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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려다 본 서울시청 전경, 1977.08.10. ‣ 동측의 교통섬은 주로 주차장으로 사용되었으며, 70년대 후반 을지로-소공로 도로를 폐쇄하여 전체를 주차장으로 사용하기도 하였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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광장 서측은 1968년 전차노선의 폐지와 함께 태평로를 확장하는 사업으로 달라졌습니다. 태평로를 50m로 확장하는 공사로 인해 덕수궁 담장이 16.5m 서쪽으로 이전하게 되었으며, 이때 도로상에 남겨졌던 대한문은 1970년 지하철 1호선 개착 공사 때 지금의 자리로 옮겨졌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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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로확장공사에따른지장물철거요청, 1968.02.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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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시청 앞 도로 전경, 1968.06.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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광장의 남측은 플라자호텔 건립을 포함한 소공동·북창동 재개발사업을 통해 형성되었습니다. 1966년 10월 미국 존슨 대통령 방한 당시 시청 맞은편의 남루한 모습이 전 세계로 중계되면서, 실추된 서울의 이미지 회복을 위한 도심재개발사업이 시급한 현안으로 떠올랐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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존슨 미국 대통령 환영 시민대회, 1966.10.3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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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에 1967년 남측 전면부에 있던 대한체육회관이 철거·이전되고 1971년부터 그 뒤편 소공지구의 재개발이 시작되었습니다. 한국화약(한화)과 화교 집단 등이 있던 1지구에는 당초 고층빌딩의 화교회관을 건립할 계획이었습니다. 그러나 한국화약이 화교의 땅을 모두 매입해 일본 마루베니와 합작하여 현재의 플라자호텔을 건립하였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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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시계획(재개발구역및특정가구정비지구)지적고시, 1973. ‣ 1971년 광장과 맞닿은 소공지구 1지구가 가장 먼저 재개발되기 시작하였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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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71년 소공지구 전경, 1971.12.2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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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시청 앞 도로, 1977.03.05. ‣ 1976년 9월 완공된 플라자호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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완공을 앞둔 1976년 7월, 부분 준공 검사에서 플라자호텔의 저층부가 광장 계획선에 저촉되는 문제가 생겼습니다. 그러나 재시공 시 안전상의 문제가 있어 광장 면적을 90㎡ 축소한 27,910㎡로 변경하였고, 현재까지 그대로 유지되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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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시계획시설(광장)변경및지적승인, 1977.08.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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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시계획 시설(광장)변경 및 지적 승인, 1977.08.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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참고문헌
서울도서관, 『서울광장, 70년의 이야기』, 서울특별시, 2015.
손정목, 『서울 도시계획 이야기 2』, 도서출판 한울, 2003.
최상철·한영주, 『서울광장의 재조명』, 서울연구원, 20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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