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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엔한국재건단(UNKRA)과 서울의 재건주택

UNKRA 재건주택은 유엔한국재건단이 원조하는 자재와 자금으로 건설한 주택이다. 1953년 12월, 대한주택영단(현 LH공사)이 전국에서 처음으로 안암동에 49채의 재건주택을 지은 이후 정릉동, 회기동 등 서울 시내에 희망주택, 부흥주택이라는 이름으로 다양한 공영주택을 건설하였다. 전쟁으로 집과 고향을 잃은 피난민들은 재건주택에 입주함으로써 다시금 삶의 터전을 마련할 수 있었다.

UNKRA 한국 재건사업

유엔한국재건단(United Nations Korean Reconstruction Agency)은 1950년 12월 1일 국제연합총회 결의에 따라 한국의 부흥과 재건을 돕기 위해 설립된 기구이다. 일명 운크라(UNKRA)라고 불리는 유엔한국재건단은 1958년 활동을 종료할 때까지 산업·교통·통신시설의 복구와 주택·의료·교육시설의 건설 등 한국에 총 122,084,000달러 규모의 원조를 제공하였다. UNKRA의 한국 재건 사업은 1953년 전쟁이 끝난 직후부터 본격화되었다. 1953년 5월 UNKRA에 의한 발전시설 및 송배전선 부흥계획에 관한 한국 정부와 유엔군사령부 간 협정이 체결됐고, 이어 휴전협정 이후인 9월에는 민간 중소기업 융자기금에 관한 협정과 함께 민간 중소광업 융자기금에 관한 협정 등이 연이어 체결됐다. UNKRA의 원조로 탄광이 개발되었고, 교과서 공급을 위한 인쇄공장, 의료 교육을 위한 국립중앙의료원 등이 건립되었다.

UNKRA의 원조에서 가장 많은 비중을 차지한 것은 공업 부문이었다. 공업 부문 원조는 소비재에서 생산재까지 여러 분야에 걸쳐 진행되었고, 전쟁으로 파괴된 기존 시설을 복구하는 것 이상으로 공장을 새롭게 건설하기도 했다. 특히 중소규모 기업에 자금과 기술, 시설을 제공하는 한편, 면방직 공업이나 시멘트 공업, 판유리 공업과 같은 몇몇 분야를 전략적으로 성장시켜 국내 생산을 증가시키고 수입을 대체하고자 했다. 이때 설립된 시설이 인천 판유리공장, 문경 시멘트공장, 충주 비료공장 등으로 전후 한국의 주요 산업시설들을 발전시키는데 기여했다.

UNKRA의 지원은 주택 부문에서도 활발했다. 한국 정부와 UNKRA는 휴전협정이 발효되고 1953년 9월부터 서울 등지에 흙벽돌 전재민 주택인 재건주택 건설 사업을 추진했다.

1953년 10월 기준으로 2년 동안 한국에 모두 5,500채의 흙벽돌 재건주택을 건설한다는 목표를 설정했고, 서울 안암동 재건주택 단지를 시작으로 전재민들의 주거 문제 해소를 위한 주택 건설 사업을 실시했다.

UNKRA 원조조인식(1953)

<UNKRA 원조조인식(1953)>
콜터 UNKRA 단장과 백두진 국무총리가 원조협정을 체결하고 있다.
출처: 국가기록원

국립중앙의료원 개원식(1958.10.2.)

<국립중앙의료원 개원식(1958.10.2.)>
출처: 서울기록원

이승만 대통령과 콜터 UNKRA 단장의 흙벽돌 기계 시연 참관(1953.9.)

<이승만 대통령과 콜터 UNKRA 단장의 흙벽돌 기계 시연 참관(1953.9.)>
출처: 서울기록원

<대한늬우스 제27호 : 이승만 대통령 후생주택 시찰(1953.10.)>
출처: KTV 국민방송

UNKRA 재건주택

재건주택(再建住宅)은 흔히 (일반)후생주택으로도 불리며, 휴전 이후 전국적으로 건설된다. 당시 대한주택영단을 관할하고 있던 정부부처인 사회부와 UNKRA는 재건주택을 전국에 건설할 것을 결정하고 경인지구에 2,500호와 전국 각 도에 3,000호를 배당했다. 그 중 서울에는 안암동에 49호, 정릉동에 325호, 회기동에 252호, 대현동에 208호, 돈암동에 73호, 영등포에 97호가 계획되었다.

정릉동 재건주택 단지

<정릉동 재건주택 단지>
출처: 서울기록원

안암동 재건주택 단지는 UNKRA가 원조 사업으로 시행한 첫 번째 흙벽돌 주택단지이다. 이 사업을 위해서 운크라는 ‘Landcrete machine(이하 랜드크렛)’이라는 흙벽돌 제조기를 수입했다. 이 기계는 UNKRA가 아프리카의 흙벽돌집이 견고한 것을 보고 남아공에서 들여온 것이었다.

랜드크렛이라는 이 흙벽돌 제작기는 성인남자 5명이 한 조가 되어 조작하는 방식으로 벽돌을 한 시간에 40장씩 만들어낼 수 있었다. 안암동에서 실험된 흙벽돌 제조기는 이후 국내 업체가 개발·생산하게 되면서 전국의 흙벽돌 재건주택 건설에 사용되었다. 재건주택에서 사용된 흙벽돌은 1958년 시멘트블록이 개발되기 전까지 공공주택에서 가장 많이 사용된 재료였다.

재건주택 건설 현장에서 사용된 흙벽돌 제조기

<재건주택 건설 현장에서 사용된 흙벽돌 제조기>
출처: 서울기록원

재건주택은 건평 9평으로 방 두 칸과 마루 한 칸, 부엌 한 칸의 구조로 지어졌는데, 당시 총공사비는 12만 환이었다. 이 공사비는 10년간의 연부(年賦)로 상환하게 되어 있었다. UNKRA 재건주택의 입주자의 우선 순위는 ① 서울시에 6·25전쟁 전에 주택을 소유하고 거주한 자로서 전쟁으로 인하여 주택이 전소, 전파되어 현재 주택이 없는 자 ② 극빈피난민 ③ 반파된 주택소유자 순이었다.

9평형 재건주택 평면도

<9평형 재건주택 평면도>
출처: 대한주택공사

안암동 재건주택 내부

<안암동 재건주택 내부>
출처: 서울기록원

1950년대 서울의 공영주택

전후 재난민들의 주거 문제는 무엇보다 시급한 사안이었다. 정부는 전쟁으로 인한 주택 손실을 복구하고 전쟁으로 해체된 가족과 실향민들을 위한 주택을 지어 공급하기 시작했다. 당시 등장한 몇 가지 대표적인 주택의 명칭을 열거하자면 재건주택, UNKRA주택, ICA주택, 부흥주택, 희망주택 등이다. 주택의 명칭은 전쟁 참화를 딛고 일어선다는 의미에서 재건, 희망, 부흥 등의 이름이 붙여지거나 건설 자금의 조달 방식에 따라 해외원조의 주체가 되는 기구나 기관 이름이 붙여지기도 했다.

안암동 재건주택과 입주민 가족들(1954)

<안암동 재건주택과 입주민 가족들(1954)>
출처: 서울기록원

재건주택은 UNKRA가 원조하는 자재 및 자금으로 건설·관리하는 주택으로 흔히 UNKRA주택, 후생주택으로도 불리었다. 희망주택은 재건주택과 비슷한 시기에 비슷한 집 구조(9평형)로 지어진 주택이지만, 대지와 공사비를 입주자가 부담하고 자재에 한하여 대한주택영단에서 배정한다는 점에서 차이가 있었다. 1954년~1955년에 걸쳐 휘경동에 41호, 회기동에 88호, 창천동에 109호, 정릉동에 56호, 홍제동에 40호의 희망주택이 공급되었다. 이후 1958년 노량진과 1960년 대방동, 녹번동에 12평형과 20평형의 희망주택이 지어지기도 했다.

완공된 안암동 재건주택(1953)

<완공된 안암동 재건주택(1953)>
출처: 서울기록원

1950년대 후반부터는 공영주택 건설이 외국의 원조자금과 자재를 주택 생산에 직접 투입하는 방식에서 융자 지원 방식으로 전환되었다. ICA주택은 미국국제협력처(International Cooperation Administration)와 정부가 체결한 협정에 의해 ICA의 자금을 지원받아 원하는 사람들에게 융자를 해주어 지은 주택으로 1960년까지 전국에 총 5,737호에 해당하는 예산을 지원받았다. 부흥주택은 산업은행이 발행하는 산업부흥국채를 재원으로 공급한 주택을 말한다. 1957년부터 본격적으로 건설되었으며 이때는 '부흥부'(1961년 건설부로 변경)라는 부처도 설립되어 ‘재건’ 이후 본격적으로 ‘부흥’에 박차를 가하기 시작한 시기로 청량리와 홍제동 일대에 부흥주택이 건설되었다.

미아동 ICA 주택

<미아동 ICA 주택>
출처: 국사편찬위원회

지역별 공영주택 분포

(서울의 재건주택) 지역별 공영주택 분포 현황

재난민 박일환씨의 서울 안암동 재건주택 정착 이야기

UN아카이브에서 발굴한 사진기록을 바탕으로 재난민 박일환씨의 안암동 재건주택 정착 과정을 재구성하였다.

출처: 서울기록원

#1 전쟁 전 흥남에서 살다

1909년 흥남에서 태어난 박일환씨는 비료공장에서 일하며 가족들과 함께 가난하지만 단란한 일상을 보내고 있었다. 그러나 1950년 한국전쟁이 일어나고 함경남도 흥남의 공업지대는 무차별적인 폭격을 맞게 된다. 이로 인해 도시 전체는 폐허가 되고 10만여 명의 피난민이 발생했다.

6·25전쟁 당시 미군에 의해 폭격된 흥남 비료공장

<6·25전쟁 당시 미군에 의해 폭격된 흥남 비료공장>
출처: 미국 국립문서기록관리청

#2 흥남철수, LST 타고 부산으로

박씨의 가족은 지하에 숨어서 폭격을 피해야 했고 형제들은 뿔뿔이 흩어졌다. 살아남은 식구들은 1950년 12월 22일 부산으로 가는 미군 LST를 타고 고향을 탈출했다. 긴 항해 끝에 부산에 도착한 박씨는 부산항 1부두에서 미군과 한국군 헌병으로부터 두 차례의 심문을 받고 부산 영도다리 인근에 자리를 잡았다.

흥남철수 모습

<흥남철수 모습>
출처: 국사편찬위원회

#3 부산에서 다시 거제도로

1951년 1월, 박씨는 사회부와 부산시의 지시에 따라 다시 짐을 챙겨 거제도로 가는 배를 탔다. 박씨의 가족은 장승포항이 내려다 보이는 마전동 임시수용소에서 생활하다가 다시 연초면 연사리 피난민촌으로 이동하여 1952년 5월까지 피난 생활을 했다.

흥남철수 피난민들을 수용했던 거제도 전경

<흥남철수 피난민들을 수용했던 거제도 전경>
출처: UN Photo

#4 서울 안암동 피난민수용소 생활

이후 정전회담이 막바지일 때 사회부가 피난민들을 분산 배치한다는 소식을 듣고 무작정 서울로 갔다. 박씨의 가족이 도착했을 때 이미 서울은 북한 피난민과 기존 서울 사람들, 전쟁으로 피해를 입어 집을 잃은 전재민들로 인산인해를 이루고 있었다. 서울에 피난민수용소는 한강을 따라 형성된 곳과 안암동과 서대문 일대 등 50여 곳이 넘었다. 대규모 피난민수용소는 서울시의 정비사업에 따라 몇몇 구역으로 한정, 재배치되고 있었다. 박씨의 가족은 안암동 피난민 수용소에 배치되어 생활하게 된다.

한강 북쪽 피난민수용소

<한강 북쪽 피난민수용소>
출처: 서울기록원

#5 안암동 재건주택에 입주하다

1953년 12월, 안암동 재건주택이 완공되고 박씨 가족은 안암동 재건주택에 입주했다. 한국 정부와 유엔한국재건단(UNKRA)은 휴전협정이 이뤄진 1953년 9월부터 서울 등지에 흙벽돌 전재민 주택인 재건주택 건설 사업을 추진했다. 박씨의 가족이 입주한 안암동 재건주택은 전국에서 최초로 지어진 UNKRA 재건주택이었다. 이들은 비록 전쟁 이전에 서울에서 거주하지 않았지만 서울시민 전재민이 1차로 먼저 입주하고 난 뒤 그 혜택을 받을 수 있었다.

<대한늬우스 제71호 : 동대문 후생주택 입주식(1955)>
출처: KTV 국민방송

[참고문헌]

  • · 박철수, '한국주택유전자1', 도서출판 마티, 2021
  • · 정은경, 1950년대 서울의 공영주택 사업으로 본 대한원조사업의 특징, '서울학연구' 제59권, 서울시립대학교 서울학연구소, 2015
  • · Earth Block Equipment, 'Housing Experimentation Equipment for Construction' Vols. I-II, UNKUR, 1955
  • · 정릉마을한바퀴 주민실행위원회, '정릉 마을 한 바퀴', 성북구청, 2017