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흔히 오키나와로 불리는 오키나와현(沖繩懸)은 일본의 남서쪽 끝에 위치하며, 가장 많은 인구가 거주하는 오키나와 본섬을 비롯해 100여개가 넘는 섬으로 이루어져 있다.
이곳 오키나와에 본격적으로 일본군이 주둔한 것은 1944년 3월이었다. 1944년 2월 미군이 미크로네시아의 트럭섬과 마리아나제도의 괌, 사이판, 티니안 등을 공격하자, 압박감을 느낀 일본군은 일본 본토 남서 방면을 방어하기 위해 오키나와 수비군인 제32군을 창설했다. 이에 따라 전쟁의 막바지였던 1944년, 10만 명이 넘는 일본군 병력이 중국 만주와 일본 본토로부터 오키나와로 집결했다. 이미 중국에서 위안소를 경험한 군인들이 오키나와로 이동했기 때문에 일본군은 이들을 상대할만한 ‘위안부’가 필요하다고 판단했고, 오키나와 각지에 위안소를 만들어 ‘위안부’를 동원하기 시작했다. 그 결과 1944년부터 1945년 종전에 이르기까지 오키나와에 100개가 넘는 위안소가 세워졌다. 1945년 3월, 오키나와에서 일본군과 미군 간의 전투가 본격적으로 시작되었다. 1945년 3월 22일 오키나와 본섬 서쪽의 게라마제도(도카시키섬, 자마미섬, 아카섬)를 시작으로 오키나와를 공격하기 시작한 미군은, 곧 이은 1945년 4월 1일 중부 요미탄 방면으로 오키나와 본섬에 상륙해 북부와 남부를 차례로 점령했다. 일본군의 조직적 저항이 붕괴한 6월 23일에 이르기까지 약 3개월 여간 지속된 이 전투는 태평양전쟁 시기 일본 영토 내에서 벌어진 유일한 장기전으로(항복서명은 9월 7일 이루어졌다), 사망자 수만 20만 명에 달했다. 이 중 민간인 희생자가 94,000명이 넘었고, 현지에서 소집된 방위대원 등을 포함한 주민 사망자가 약 18만 명으로 오키나와 전체 인구의 3분의 1에 이르렀을 뿐 아니라, 28만 명이 넘는 주민이 수용소에 구금될 정도로 민간인들의 피해가 컸다. 일본군에게는 미군의 본토 상륙을 지연?저지하기 위한 방파제 구축에 있어, 미군에게는 일본 본토 침공을 위한 교두보 확보에 있어 전략적으로 장소가 바로 오키나와였기 때문이다. 이 사진은 1945년 11월 미군의 군정활동보고서에 첨부된 사진으로 오키나와 코자 수용소에서 조선으로의 송환을 기다리고 있는 조선인 ‘위안부’들을 촬영한 사진이다. 촬영자는 확실치 않다. 사진 아래에는 일본군에 의해 오키나와로 끌려온 조선인 ‘위안부’들이 코자 수용소에 모여 11월에 있을 조선으로의 송환을 기다리고 있으며, 이 여성들은 오키나와로 끌려왔을 때부터 고국으로 돌아갈 때까지 미군정을 괴롭히는 문제 중 하나였다는 설명이 덧붙여져 있다. 이 같은 시선은 사진이 첨부된 보고서에서도 나타난다. 미군은 군정보고서에서 공공의 안전과 관련한 한 가지 문제가 일본군이 오키나와에 남긴 조선인 ‘위안부’라고 지적하고, 조선으로 귀환하기 위해 오키나와 각지에서 조선인 ‘위안부’ 40명이 코자 수용소로 모였으며 나머지 류큐제도에서도 110명이 조선으로의 송환을 기다리고 있다고 기록했다. 오키나와 점령 후 통치를 맡은 미군과 미군정은 조선인 ‘위안부’를 공공의 안전과 지역의 보건 상황을 위협하는 요소이자 오키나와의 통치에 위협적인 존재로 생각하고, 이들을 조선으로 송환하는 데에 우선적으로 초점을 맞췄던 것으로 보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