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2차 세계대전 당시 일본은 버마를 비롯해 태국, 말레이시아, 싱가포르 등 연합군의 동남아시아 식민지를 차례로 점령한 뒤 포로수용소를 설치하였다. 일본은 포로감시원으로 조선인들을 다수 동원하였는데 이 과정에서 해리 문실 짐(Harry Moon Sil Jim) 역시 시암(Siam, 현재의 태국)으로 동원되었다. 미국의 전략첩보국(Office of Stategic Service, OSS)은 1945년 9월 11일 태국에 있던 조선인 포로감시원 해리 문실 짐을 심문하여 심문보고서를 작성하였는데, 이 보고서에는 당시 태국에 있던 조선인 "위안부"에 대한 정보도 담겨있다. 심문보고서에 따르면 그는 조선에서 태어나 1925년 하와이 호놀룰루(Honolulu)로 갔고, 1933년 다시 조선으로 돌아왔다가 포로감시원이 되었다. 전쟁이 끝난 후 포로감시원들을 비롯한 태국의 조선인들은 고려인회(Korean National Association)를 만들고 연합군에 협조하고자 했는데, 해리 문실 짐은 이 조직의 대표였다. 그는 수천 명의 포로감시원이 태국으로 왔으며, 이들이 버마와 태국을 잇는 철로를 따라 있었던 포로수용소에 배치되었다고 했다. 포로감시원뿐 아니라 조선인 ‘위안부’ 역시 태국에 존재했음을 밝히고 있다. 보고서에 따르면 1945년 9월 현재 태국 지역에 있었던 조선인은 총 7,400명 정도였는데, 방콕에 포로감시원이 900명 있었고, 정규 일본군 부대에 소속되었던 병사가 5,000명, ‘위안부’가 1,500명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