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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시정보국 일본인 포로 심문보고서 49호, 1944-10-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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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기록유형
      일반문서류
    • 일자
      [생산]   1944-10-01 ~ 1944-10-01
    • 기술
      이 문서는 전시정보국 심리전팀에서 작성한 <일본인 포로 심문 보고서 49호>로, 일본계 미국인 2세(Nisei) 요원인 알렉스 요리치가 버마 미치나에서 포로가 된 조선인 ‘위안부’ 20명을 심문하고 그 결과를 보고서로 정리한 것이다. 버마는 1942년 점령 후 10만 명이 넘는 일본군이 진주함에 따라 거의 모든 주요 도시에 위안소가 설치되어 있었고 버마 북부의 주요 도시인 미치나에도 세 개의 위안소가 있었다. 조선인 "위안부"들은 미치나가 연합군에게 함락될 때 도시에서 도망쳤다가 근처에서 포로가 되었다. 이들은 인도 동북부의 레도 수용소로 옮겨져 이곳에서 1944년 8월 20일부터 9월 10일까지 3주에 걸친 상세한 심문을 받았다. 이 보고서는 본문 6페이지와 심문 대상인 조선인 ‘위안부’ 20명과 일본인 업자 2명의 이름이 적힌 부록 1페이지를 포함하여 총 7페이지로 구성되어 있다. 이 보고서에 따르면 ‘위안부’들의 동원은 상당한 수입, 손쉬운 일, 그리고 신천지인 싱가포르에서 새로운 생활이라는 전망을 내세운 업자들의 사기에 의해 이루어졌다. 여기서 손쉬운 일은 병원에 입원한 부상병을 방문하여 붕대를 감는 등의 군인을 기쁘게 해주는 것과 관련된 일로 설명되었다. 약 800명의 여성들이 속아 1942년 8월경 일본인 업자들과 함께 랑군에 도착했다. 이들은 버마 각지, 주로 일본군 부대 근처 도시들로 배치되었다. 심문의 대상이 된 미치나의 ‘위안부’들은 주로 독방에 배정되어 그곳에서 살고, 자고, 일했다. ‘위안부’의 영업은 군의 엄격한 통제를 받았다. 일본군은 위안소 통제를 위해 요금, 우선순위, 이용일정의 체계를 확립하였다. 또 군의관에 의한 성병 검진이 이루어졌다. 이 보고서는 미치나에 있었던 조선인 ‘위안부’들의 동원과정에서부터 시작하여 위안소의 설치 경위, ‘위안부’들의 신상정보에 이들에 대한 평가, ‘위안부’의 생활과 위안소 운영의 체계 등 아주 상세한 정보를 포함하고 있어, 매우 중요한 자료로 평가받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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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영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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