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시 기록 이야기 #14] 한강 나루터의 추억
한강 개발이 진행되는 동안 서울에서는 어떤 직업이 사라졌을까요?
많은 이들이 한강 다리의 편리함과 유람선의 낭만을 즐기고 있을 때, 다른 한편에는 갑자기 닥쳐 온 생계의 위협에 눈물짓는 사람들이 있었습니다.
겨울에 한강 얼음을 잘라 여름에 판매하던 얼음장수, 밤섬의 배 목수, 한강에서 고깃배를 몰던 어부 등 많은 이들이 혼란을 겪었지만, 오늘은 한강 나루의 뱃사공 이야기를 해보려 합니다.
지금은 많은 한강 다리들이 있어 사람과 자동차가 편하게 강을 건너다닐 수 있지만, 다리가 없던 시절에는 나룻배를 이용해야만 한강을 건널 수 있었습니다. 때문에 한강변 곳곳에는 배가 드나들 수 있는 나루들이 자리했는데요. 광나루, 마포나루, 노들나루 등 현재 한강 주변의 지명에서도 옛 나루의 흔적을 찾아볼 수 있습니다.
〈조선시대의 한강 나루터〉, 《서울2천년사》, 서울역사편찬원, 서울역사아카이브 이미지 재편집
https://museum.seoul.go.kr/archive/archiveView.do?type=A&type2=area&arcvGroupNo=2265&lowerArcvGroupNo=2985&arcvMetaSeq=18534&arcvNo=49239
〈해방당시의마포나루터-정남영미육군대위가촬영〉, 《마포새우젓나루터》, 1945.12.31., 총무처 정부기록보존소, 국가기록원 소장
http://theme.archives.go.kr/viewer/common/archWebViewer.do?bsid=200200097445&dsid=000000000001&gubun=search
이러한 나루에 터를 잡고 배를 대어 사람들의 이동을 돕던 이들이 바로 뱃사공들입니다. 1950~60년대의 사공들은 나루 한 곳당 하루 평균 1백 명에서 2천 명 정도의 승객을 강 너머로 건네주었습니다. 주로 강남의 야채장수, 학생들, 강북의 ‘서울’에 직장이 있는 사람들이 나룻배를 이용하였는데, 제한된 정원이 없어 많은 사람들이 한 배에 몸을 실었고, 가축과 손수레, 심지어 자동차까지도 함께 올라타곤 했습니다.
배를 출발하는 시간은 정해져 있지 않고, 적정한 인원이 탔다고 생각하면 사공이 노를 젓거나 모터보트가 나룻배를 밀도록 하여 배를 움직였습니다. 마음 급한 승객들은 출발을 기다리는 동안 애가 타기도 하고, 배가 떠난 후 강변에 도착한 사람들은 나룻배가 돌아올 때까지 하염없이 기다려야 했지만, 사실상 유일한 교통수단인 나룻배를 타지 않으면 강 너머로 이동할 수 없기에 사공의 방식을 따를 수밖에 없었습니다.
사공들은 그 나름대로 강물이 얼어붙은 한겨울이 아니면 쉬는 날도 없고, 별다른 휴식시간도 없이 배를 움직여야 했습니다. 한밤중 거나하게 술에 취한 이가 불러내면 한 사람을 위해 노를 젓기도 하였고, 6・25전쟁 때는 한강 다리가 폭파되어 피난하지 못한 이들을 몰래 이동시키기도 하였으며, 강물에 빠진 사람이 있으면 나서서 인명을 구하기도 하였습니다.
〈도선장경영허가신청의건〉, 《고시(제264호~제300호)》, 1959.03.17., 서울특별시 행정국 민원과
https://archives.seoul.go.kr/item/857125
〈도선장경영허가신청에관한건〉, 《고시(제264호~제300호)》, 1959.03.17., 서울특별시 행정국 민원과
https://archives.seoul.go.kr/item/857126
그러나 나룻배와 관련된 사고가 계속해서 발생하고 한강 다리가 늘어나면서 뱃사공들은 점차 그 설 자리를 잃어갔습니다. 나룻배 관련 사고는 서둘러 배에 오르려던 승객이 물에 빠지는 사고, 모터보트의 모터가 갑자기 멈춰버리는 사고, 운행 도중 나룻배가 뒤집히는 사고 등 원인도 결과도 다양했는데, 이런저런 불편함에 대한 불만이 쌓여 있던 상황에서 위험성에 대한 불안이 더해지자 다리 건설을 요구하는 목소리가 높아져 갔습니다.
〈위험지대(3)_나룻배 뚝섬-봉은사〉, 《경향신문》, 1964.3.26., 서울역사아카이브
https://museum.seoul.go.kr/archive/archiveView.do?type=A&type2=area&arcvGroupNo=3362&lowerArcvGroupNo=3363&arcvMetaSeq=32291&arcvNo=85502
〈김현옥 서울시장, 사당동 사고현장 시찰〉, 1969.08.09., 서울특별시 공보실
https://archives.seoul.go.kr/item/6243
결국 나루가 있던 자리에 속속들이 다리가 들어서면서 폐쇄되는 나루가 늘어나게 되었고, 뱃사공들도 하나 둘씩 새로운 일자리를 찾아 떠나기 시작하였습니다. 뱃사공들 또한 다리가 건설될 수밖에 없는 사정을 이해하고 수긍하였지만, 평생의 터전이 사라지고 함께 일하던 사람들이 하나 둘씩 떠나는 것을 보며 씁쓸한 마음이 드는 것까지는 막지 못하였습니다. 평생 나룻배를 몰아온 이들은 대부분 막노동판으로 발길을 옮겼고, 다른 나루를 찾아 서울을 떠나기도 하였습니다. 서울이 ‘나루 없는 도시’가 된 지금, 한강 나루와 뱃사공들의 이야기는 이제 몇몇 이들의 기억과 일부 기록 속에만 남아 있게 되었습니다.
〈제3한강교위치도〉, 《No.47002161-002200》, 1965, 서울특별시 도시계획국 시설계획과
: 노란색은 나루 표시 (현재의 한남대교, 성수대교, 영동대교 위치)
〈도선장진입로철거요청에따른조치〉, 《잠실지구공유수면매립철설계서및신청서(김영년)》, 1971.06.19.,
서울특별시 건설기획국 하수계획과
https://archives.seoul.go.kr/item/1189448
〈한강 나룻배〉, 《한강나룻배》, 1975.12.24., 공보처 홍보국 사진담당관, 국가기록원 소장
http://theme.archives.go.kr/viewer/common/archWebViewer.do?bsid=200200065274&dsid=000000000001&gubun=search
〈서울, 어제와 오늘_마포항〉, 《서울시보》 제31호, 1982.11.11., 서울특별시
https://archives.seoul.go.kr/item/1071361
서울기록원 《한강, 서울_기억이 흐르다》 전시의 〈한강교통의 기점 나루〉 파트에서도 한강 나루와 뱃사공 관련 자료를 확인하실 수 있습니다.
※ 참고자료 : 한강 나루 뱃사공 관련 신문기사 바로보기
1) 「천직(3) 뱃사공 : 서빙고 나룻터 이봉선씨」, 『조선일보』 제11489호, 1959.04.23. 【3면】
2) 「비극의 강변 서울의 나루터」, 『동아일보』 제12573호, 1962.09.11. 【3면】
3) 「위험지대<3> 나룻배 뚝섬-봉은사」, 『경향신문』 제5670호, 1964.03.26. 【6면】
4) 「근대화에 밀려나는 한남동나루터」, 『경향신문』 제7455호, 1969.12.26. 【4면】
5) 「‘금룡상’을 받은 ‘나루터 아저씨’」, 『조선일보』 제14397호, 1968.02.03. 【4면】
6) 「서울…새 풍속도 : 나루터를 쫓는 다리」, 『경향신문』 제7703호, 1970.10.16. 【6면】
7) 「떠나야하는 ‘최후의 뱃사공’ : 잠실교 준공 앞둔 ‘숙이아버지’」, 『조선일보』 제15616호, 1972.01.11. 【6면】
8) 「나룻배에 판자집, 가족 싣고 그 뱃사공은 떠났다」, 『조선일보』 제15763호, 1972.07.01. 【7면】
9) 「이해에 나는…1972년의 주역을 찾아 : 신천 마지막 뱃사공 김용태씨」, 『동아일보』 제15768호, 1972.12.29. 【7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