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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시 기록 이야기 #16] 추억 속의 한강

[전시 기록 이야기 #16] 추억 속의 한강

2022-02-14 보존서비스과 조회수 : 1022

1982년 10월 4일 《서울시보(서울시민신문)》는 지면 하나를 통째로 할애하여 한강의 옛 추억을 나누었습니다. 9월 28일에 있었던 한강종합개발 기공식 소식을 전하며 특집기사를 기획한 것입니다.

“어제의 한강을 되돌아 본다”, “서울의 맥 ‘한강’은 흐른다”, “강변 명승 많기로는 한국 제일”, “여름에 수영, 겨울엔 스케이팅 선상서 술잔 기울이는 낭만도” 등 한강의 특성을 보여주는 타이틀과 옛 한강의 모습이 담긴 사진들이 눈에 띄는데요. 구체적으로 어떤 내용들이 실렸는지 살펴보도록 하겠습니다.
 



〈서울의 맥 ‘한강’은 흐른다〉, 《서울시보》 제27호, 1982.10.04., 서울특별시

https://archives.seoul.go.kr/item/1071361


<어제의 한강을 되돌아 본다>
먼저 이 기사가 기획된 배경이 소개되었습니다. 한강종합개발사업을 눈앞에 둔 시점에 겨레의 희로애락을 모두 지켜본 강이자 서울의 상징인 한강의 유래를 되돌아보고자 했다는 것입니다.
 

어제의 한강을 되돌아 본다

한강은 흐른다-.
겨레의 희로애락을 지켜보며 도도히 흐르는 한강줄기는 우리민족의 저력이 한곳으로 이어지는 표상이기도 하다. 
그러면서 한강이라면 우리는 6・25의 비극을 잊을 수 없다.
또 한강이라면 지방 사람들이 서울에 입성을 하는 데는 이 강을 건너야 했기 때문에 한강다리를 건널 때면 “이제 서울에 왔구나”하는 실감을 자아내기도 했다.
이런 한강을 근대에 와서는 인구분산책으로 이 한강을 사이로 강북과 강남이란 2개의 서울이 형성되어 있다.
한말로 한강에는 변화무상한 세정(世情)이 담긴 서울의 상징이기도 하다.
이제 우리는 이 한강에 펼쳐질 ‘한강종합 개발사업’이란 대역사의 기적을 눈앞에 바라보며 한강의 유래들을 되돌아봄직도 하다.

<편집자>

〈서울의 맥 ‘한강’은 흐른다-어제의 한강을 되돌다 본다〉, 《서울시보》 제27호, 1982.10.04., 서울특별시

https://archives.seoul.go.kr/item/1071361


<한강의 유래>
한강은 강원도 삼척에서 시작된 남한강과 금강산에서 시작된 북한강이 두물머리(양수리)에서 합쳐져 서울을 가로지르고 서해로 흘러가는 강입니다. 대수(帶水), 아리수(阿利水), 욱리하(郁里河), 한수(漢水) 등으로 불렸습니다. 삼국시대에는 백제, 고구려, 신라의 각축장이었고, 조선시대부터는 수도의 강으로서 그 중요성이 다시금 높아졌습니다. 한강은 현재까지도 서울의 정치・경제・문화 중심지로 기능하고 있습니다.
 

◆ 한강의 유래

  한강은 강원도 삼척군(현재는 삼척시)에서 시작한 남한강과 금강산에서 비롯된 북한강이 양수리 부근에서 합치어 팔당을 지나 용산의 남쪽을 흘러 서해로 들어가는 강이다. 삼국 초기에는 대수(帶水)라 불리우고 호태왕비(광개토대왕릉비)에는 아리수(阿利水)라고 되어 있으며 백제본기 개로왕 21년조에는 욱리하(郁里河)로 기록되어 있으나, 백제가 동진과 교통하여 중국문화를 수입한 이후는 명칭을 중국식으로 고쳐서 한수(漢水)라 하였다. 그 후 옛이름은 차츰 없어지고 한수 또는 한강이라고만 불리어졌다. 상류는 남・북 2강으로 갈라져서 모두 강원도의 태백산에서 발원하는데 남한강은 강원도 남부 대덕산 북쪽에서 북한강은 금강산 북쪽에서 시작, 양극에서 합류한다. 이에 수량이 크게 많아져서 서울 남쪽을 지나 임진강과 합류되면서 점점 크게 되고 다시 예성강을 병합, 황해로 들어간다. 유역에는 춘천, 영월, 여주 등의 분지와 하류에는 김포평야를 형성하여 국내 굴지의 곡창지대를 형성한다. 가항거리는 330km이며, 관개지역과 가항거리는 전국의 2위이다. 특히 이태조의 한양천도이래 수도의 수호강의 역할을 하였다.
  특히 하류에는 여의도・난지도 같은 하중도가 생기고 임진강과 합류되는 하구 부근에는 넓은 충적평야가 발달되어 전답에 이용된다. 강의 길이는 405.5㎞, 평균경사 32/10,000, 여러 지류가 수지상으로 발달되어 그 유역은 2,6만㎢나 된다. 서울은 그 하류의 양안부를 차지하고 있다.
  한강의 고명(古名)은 ‘아리’이다. 한강의 한(漢)이라는 이름이 언제 무슨 뜻으로 붙혀진 것인가는 두고서도 ‘아리의 하(河)’라고 불리워진 것은 무엇보다 먼저 호태왕비(광개토대왕릉비)에 의해서 확인되고 있다. 다만 한강을 지나(중국)의 고문헌에서는 대수(帶水)라고 했는데 이 말도 실은 ‘아리’ 혹은 우리의 음운변화에 의한 ‘우대’의 ‘대’이며, 대수도 결국 우리 수(水)의 지나(중국)류의 일자표현에 지나지 않는다. ‘아리’를 열(列)이라고 한 것이나 대(帶)라고 한 것이나 음운의 법칙에서는 잘 수긍할 수 있는 것이다.
  이 한강유역은 역사상으로 어느 지역보다도 중요한 위치를 차지하여 왔다. 3국시대를 보면 첫째 백제가 이 지역인 하북위례성에서 건국하였으며 고구려가 남하하여 이 지역을 정령할 때까지 백제의 중심지가 되었다. 그 후 신라의 이 지역 점령의 의의는 특히 중국과 해상으로 직접 교통할 수 있었다는 점이다.
  요컨대 3국시대의 한강유역은 3국간의 쟁패장이었다. 근세에 와서 한강유역은 다시 중요시되어 근세조선의 수도가 여기에 자리잡음으로써 현재까지 계속 정치, 경제, 문화의 중심지로 되어 있다.

〈서울의 맥 ‘한강’은 흐른다-한강의 유래〉, 《서울시보》 제27호, 1982.10.04., 서울특별시

https://archives.seoul.go.kr/item/1071361


<기능과 역할>
한강에는 광나루부터 양화도를 지나 한강 하류에 이르기까지 곳곳에 나루가 위치하였습니다. 이 나루들을 중심으로 한강은 지방의 조세를 한양으로 운송하는 보급로이자 상업 활동의 중심지로 기능하였습니다. 또한 한강진, 송파진, 양화진, 노량진 등 진영이 설치되어 도성을 수비하는 요지의 역할을 수행하기도 하였습니다.
 

◆ 기능과 역할

  ▲ 조운(漕運)=경강(京江)에 설정되었던 나룻터는 현 위치에서 볼 때 광진(廣津) 즉 광나루에서 시작하여 양화도를 지나 한강의 하류쪽에 이르는 사이를 주로 지적한다. 한강조운의 대부분을 점하는 서울에서 충주까지의 수로에 대해서 보면 한양천도가 이룩된 지 얼마 안된 태조4년(1395) 1월 용산강에서 충주 연천(淵遷)에 이르는 사이에는 수로전운소 완호별감(水路轉運所完護別監)이 7개소에 설치되었으며 매소마다 30호가 예속되어 있었다. 수로전운소 완호별감은 수참전운별감(水站轉運別監)이라고 불렀는데 태종14년(1414) 12월에는 수참전운사(水站轉運使)로 고치고 사(使)・부(副)・판관(判官)을 두어 이를 관장케 하였다. 또한 조선왕조 후기에 이르러 국가에서 세제개혁과 아울러 대동법이 설치됨에 따라 한강은 더욱 중요성을 지니게 되었다.
  호남을 비롯하여 충청도 등지에서 수납되는 대동미는 조운선을 통하여 한강으로 수송되어 백관(百官)의 녹봉을 주고 국가재원을 충당시켜주는 보급로와도 같이 되어 있다.
  나룻터는 노량진・광장진・마포・동대(東帶)・삼전도・중량포(中梁浦)・속계(涑溪)・서빙고・용산강・흑석진・동작도・한강도(사근도・사리진도) 도미진(광미진) 두모포・서강・뚝도・양화도・사천(모래내) 공총진(공암진) 조강도 등이 운용되었다.

 ▲ 상업활동=전체 조선시대를 통하여 가장 번화한 도시였고 정치적・경제적 위치 때문에 그곳을 흐르는 한강유역은 어느 하천유역보다도 경제성이 높은 곳이었다. 서울지역의 한강은 경강이라 하여 전국의 중요한 물산이 선운에 의하여 이 지역으로 운반됨으로써 경강변에는 조선초기로부터 운수업은 물론 선박으로 상업활동을 하는 선상업이 활달하였고, 강남 혹은 경강상인이라 부르는 상인들이 용산・강서・마포지역을 중심으로 활동하였다. 경강상인들의 활동은 당초 세곡운반으로부터 발달하였다.
  조선왕조가 전국 각 지방에서 거두는 세곡은 내륙지방의 경우를 제외하고는 모두 선박으로 경강에 운반되었고, 이와 같은 세곡운반은 조운제도에 의하여 정부가 보유하고 있는 조선(漕船)이나 병선으로 운반하는 것이 원칙이었으나 한편 사선(私船)으로 운반되는 경우도 많았다. 경강상인들의 선상활동은 서울이란 소비도시를 배경으로 하고 미곡・어물・소금 등 상품을 중심으로 발달하였다. 한강변에 근거를 둔 경강상인들은 선박을 이용하여 전라도, 황해도, 평안도 등 쌀・어물・소금의 생산지로 나아가서 상품을 사서 모아 한강변으로 운반하고 이것을 서울시내의 상인들에게 공급하였으므로 한강변에는 일찍부터 서울상업의 또 하나의 중심지를 이루고 있었던 것이다.

 ▲ 도성수비=영조 21년 부수찬(副修撰) 홍중효(洪重孝)의 도성수비 5개 불가론 가운데 5번째 두모포 이상의 강세(江勢)가 급하고 또 동교(東郊)가 평연(平衍)해서 적을 막을만한 피장(陂障)이 없다고 주장, 영조 23년 강상제창(江上諸倉)을 성내로 이입(移入)시켜 금위영과 어영청의 창고를 제일 먼저 이입하였다.
  한편 진영으로는 한남동에는 조선시대에 한강진이 있었다. 서울을 중심으로 한강 상류에 송파진이 있고 하류에 양화진 그 중간에 한강진이 있어 이 진영들은 한강대안인 노량진과 개성남쪽인 임진도와 함께 서울을 경비하는 5대 요지였다. 노량진에도 조선시대에 진영이 있었다. 한강진과 양화진이 모두 조선 제21대 영조때에 창설되었지만 노량진은 그에 앞서 제19대 숙종 29년(1703)에 창설되었다.
노량진이 숙종때의 금위영에 예속되었었으나 정종때에 이르러 장용영으로 옮겨졌고 또 주교소 겸 별아병장을 파영한 뒤에는 다시 금위영 소속이 되었다.
  양화진은 마포구 당인동, 합정동, 망원동 일대에 조선 5백년 동안 송파진 한강진과 함께 진영이 되어 있었다. 서울은 동・남・서를 한강이 굽이쳐 얼싸안고 있어서 천연 방어선을 이루고 있었다.
  그런데 고종 3년(1866)에 대원군이 천주교 선교사를 학살하였다는 보고에 접하자 전함 ‘프리모게’호 외의 2척의 불국(프랑스)함대가 강화로부터 양화도까지 치밀어 올라와서 한때 서울 장안을 소란케 하던 일과 임오군란 때에 일본공사 화방(花房, 하나부사)이하 20여명이 허겁지겁 인천으로 도망할 때 이곳을 거쳐서 겨우 생명의 위협을 면한 사실 등등은 양화도와 얽힌 현대사의 한토막들이다.



1910년대의 한강변...초가와 거룻배가 한가롭기만.


새우젓하면 떠오르는 1910년대의 마포강변


1900년대의 한강수는 주변 주민들의 식수로 쓰이기도.
〈서울의 맥 ‘한강’은 흐른다-기능과 역할〉, 《서울시보》 제27호, 1982.10.04., 서울특별시

https://archives.seoul.go.kr/item/1071361





〈조선시대 한강의 나루〉, 서울역사아카이브

https://museum.seoul.go.kr/archive/archiveView.do?type=A&type2=area&arcvGroupNo=2265&lowerArcvGroupNo=2985&arcvMetaSeq=18534&arcvNo=49239


<정서와 낭만>
한강은 서울 시민들의 여름철 피서지였습니다. 많은 이들이 한강에서 수영을 하고, 강 위에 배를 띄운 채 술잔을 기울이기며 행락을 즐기기도 하였습니다. 겨울에는 거대한 스케이트장이자 얼음낚시장이 되었고, 곳곳에는 빼어난 명승들이 가득했습니다. 한편으로는 심심찮게 일어나는 자살 사건으로 인해 인도교(한강대교) 가운데에 “잠깐만 참으십시오”라는 안내판을 붙여야 할만큼 서울 시민들의 애환이 서린 곳이기도 합니다.
 

◆ 정서와 낭만

  누가 뭐래도 서울의 여름은 한강이었다. 지금에 와서는 먼 이야기일테지만 한때는 유일의 납량장이자 수영장이었던 것.
  인도교에서 사방을 돌아보면 서늘함이 우선 별천지에 온 듯하고 유유히 흐르는 쪽빛 물결을 내려다 보노라면 대자연의 신비에 접하는 느낌이 가관이었다. 강 위 선상에서 술잔을 기울이는 행락은 도심에서 해방된 기분을 넘치게 하였고 관화대회 등이라도 있을 때에는 강기슭이 일대 행락지로 변한 일도 있었다. 하나 한편으로는 인도교 한가운데는 ‘잠깐만 참으십시요’라는 표찰이 붙기에 이르렀다. 속칭 ‘마의 한강’이라고 불리기까지 한 청춘남녀의 사랑의 한을 남기게 한 곳이고 이래저래 세상을 못다 살고 스스로 몸을 던진 곳이기도 해 안타까웠다.
  한편 겨울이 오면 거대한 강줄기가 모두 얼어붙어 강상은 커다란 스케이트장이 돼 스케이트 팬의 가장 큰 환락장이 되었고 이맘때면 여러 곳에 텐트부락이 생기는가 하면 여기저기에는 노점이 들어섰다. 또 빙상 잉어낚시의 오락도 한층 시정을 느끼게 하였다.
  한강변을 중심으로 명승지와 명물이 헤아릴 수 없이 많이 있다. 생각나는대로 적어보면 광진・대산(臺山)은 광나루와 자양동 강변에 우뚝 솟은 산벌이다. 뚝섬유원지・동호의 호수・용산강의 연안풍경・노량진의 풍경・마포의 팔경과 신도팔경 중의 제6경인 서강조박(西江漕泊)의 서강이 있다.
  그뿐이랴. 입석포의 낚시터・잠두봉(지금의 절두산)・양화도의 승지풍경・제천정의 달구경・망원정의 감중야중의 풍경이 일품이었다.
  강변의 명물로는 잠실의 뽕나무(지방기념물 제1호)・황쏘가리(천연기념물 제190호) 등이 있었지만 지금은 모두가 옛이야기가 되고 있다.



1950년대까지만 해도 한강은 낭만이 담긴 서울의 상징이었다.


한강의 겨울낚시는 낭만의 하나로 꼽았다.
〈서울의 맥 ‘한강’은 흐른다-정서와 낭만〉, 《서울시보》 제27호, 1982.10.04., 서울특별시

https://archives.seoul.go.kr/item/1071361




〈뚝섬유원지〉, 1956, 서울역사아카이브

https://museum.seoul.go.kr/archive/archiveView.do?type=A&type2=area&arcvGroupNo=2265&lowerArcvGroupNo=2985&arcvMetaSeq=18551&arcvNo=49250




〈한강빙상어부고기잡이〉, 《한강빙상어부고기잡이》, 1958, 공보처 홍보국 사진담당관, 국가기록원 소장

http://theme.archives.go.kr/viewer/common/archWebViewer.do?bsid=200200048356&dsid=000000000001&gubun=search


<한강변의 사적(史蹟)>
한강변에는 후기구석기시대의 유적부터 청동기시대의 유적까지 다양한 선사시대 유적들이 있습니다. 가장 유명한 유적은 한국 신석기시대의 대표 유적인 암사동 유적입니다.
삼국시대 유적으로는 풍납토성, 아차산성 등의 한성백제기 유적이 있고, 조선시대 유적으로는 왕궁에서 쓰는 얼음을 저장했던 서빙고와 동빙고, 관료들의 녹봉을 저장했던 광흥창, 군용 곡식을 저장하던 군자감, 한강변의 정자인 제천정・압구정・낙천정・토정 등이 있습니다.
 

◆ 한강변의 사적

<구석기시대 사적> ▲ 서울지구의 구석기시대=후기구석기로 보이는 석기를 강남의 역삼동, 가락동, 암사동 등지의 지층의 단면에서 발견하였다고 보고되고 있다. 신석기시대의 한강하류 현재의 서울계곡, 한강 강변에는 전기부터 사람들이 살기 시작하였으며 이들은 북쪽에서 퍼져 들어온 소위 고아시아족의 일파였다. 이들은 강북으로는 양주군 도곡리, 동막리, 지금리 등 구릉사면이나 강사지(江砂地) 강남에서 광주군 미사리, 선리, 암사리, 면목리, 가락리(현재는 서울시에 편입) 등지에 조그만 취락을 형성하고 있었으며 더 하류 지방에도 당연히 퍼져있었을 것이나 유적의 매몰로 발견되지 못하고 있다.
  ▲ 암사동 유적지=1925년 소위 을축 대홍수때 강반사대지(江畔砂臺地)가 크게 파괴되면서 많은 토기편이 노출되어 유명해진 유적이며 그때부터 한국 서중부의 신석기문화를 대표하는 존재가 되었다.
  청동기시대는 신석기시대에 비해서 유적 수는 급증하고 있으며 암사동과 경부고속도로 사이의 잠실・영동지구 일대에 동쪽으로부터 고덕동 명일동 방이동 가락동 문정동 논현동 역삼동 반포동 등 유적들이 분포하고 있다.
  ▲ 명일동 주거지=청동기 후기의 것이라고 생각되며 1961년 김정학 교수에 의해 발굴되었다. 이곳은 암사동 남쪽 해발 42m의 야산사면에 있으며 한변 6m 정도의 방형(方形)에 가까운 평면이다.
  ▲ 고덕동 유적지=한강까지의 최단거리는 7백여 m이고 암사동 동북방 1.8km에 위치하는 야산의 표면에서 석기 토기가 채집되었다.
  ▲ 문정동・암사동・풍납동・논현동=이 일대서도 석기시대의 유물이 채집되었다.

<삼국시대 사적>
  ▲ 양진성=백제 시조14년에 위례성에서 천도하여 한산에 성을 쌓고 한강 서북을 한성민으로 나누었다. 여지승람고적에 이르기를 “장한성(長漢城)은 한강의 윗쪽에 있는데 신라가 중진(重鎭)을 두었으나 후에 고구려가 점령하게 되었으니 신라 사람들이 군대를 일으켜 다시 찾았다”고 한다.
  ▲ 광주 풍납리토성=사적11호, 이 성은 초기 백제시대의 토성으로 일설에 의하면 고구려가 대방을 정벌함에 대력에서 구조를 청함으로 출사하여 이를 구하였던 바 고구려에서 원한을 품게 되어 백제왕이 그 침공을 우려하여 이 성을 수축하였다고 한다. 길이는 동벽이 1천5백m, 남벽이 2백m, 북벽이 3백m 가량 되는데 서벽은 1925년 대홍수 때 유실되었다.
  ▲ 아차산성=사적 제234호, 한강 광장진 배후에 있는 아차산성에 부등변방형의 삼국시대 산성이 있는데 백제 온조왕이 광주 춘궁리에 도읍했을 때 쌓았다고 하며 백제 초기의 국토인 한성시대에는 이 산성의 역할이 매우 컸을 것이고 한강을 사이에 둔 풍납리토성과 함께 막중한 수비의 임무가 부여되었을 것으로 생각된다. 이 성은 표고 200m의 산정에서 시작하여 동남으로 한강을 향하여 산중복이상 부분을 둘러서 주위가 약 1km이며 형식은 이른바 테뫼식에 속하게 되지만 규모가 매우 크다.

<조선시대 사적>
  ▲ 서빙고=이씨 조선시대에 빙고가 있었다. 지금 빙고가 남아 있지는 않지만 고종 31년(1898)까지도 그 제도가 전하여 왔다. 지금 서빙고동 파출소가 있는 자리 위 북쪽으로부터 비스듬히 뻗친 산허리 일대가 빙고 터전이었다. 당시 서빙고에 저장했던 얼음은 왕궁에서 쓰였다.
  ▲ 동빙고(사한단)=이씨조선 초기인 연산군 시절까지 두모포 즉 지금의 옥수동에 있었다. 이곳에 저장됐던 얼음은 주로 제사용으로 쓰였다. 이 동빙고는 청계천에서 흐르는 흙탕물이 한강으로 빠지는 폐단을 피해서 위생상 이곳에 다시 빙고를 둔 것이다.
  ▲ 광흥창지=지금 와우산 기슭은 참전・상수・하수 등 여러 동네가 들어 있지만 동편 기슭 참전동에는 일찍이 이씨조선 초기부터 광흥창이라는 큰 창고가 있었다. 여기에는 관리들에게 주는 봉록미를 저장했었다.
  ▲ 군자감지=원효로 3가 1번지 한국인쇄주식회사가 있는 터전은 군자감의 강감이 있었던 곳이다. 군자감은 이씨조선 시대에 전국 군전으로부터 곡식을 받아들여 군용으로 쓰기 위하여 여축하는 곡식을 맡아 보관하는 기관이었다.
  ▲ 제천정지(수표석)=한남동과 보광동 사이를 남산에서 뻗어나간 지맥인 표고 79.2m 되는 산줄기가 한강과 접한 등성이에는 일찍이 이씨조선시대에 제천정이 있었다. 이 정자는 나라에서 소유하고 중국에서 사신이 오면 반드시 처음에 이곳에 초대, 술을 마시고 시를 읊고 한강에 배를 띄워 유흥을 즐겼다 한다.
  ▲ 압구정=상당 부원군 한명회가 두모포 남쪽 언덕에 정자를 지었다. 건물은 헐어서 없어졌으나 그 터는 남아 있다. 압구정이 있는 마을이라 하여 압구정동이라는 명칭이 붙었다.
  ▲ 낙천정지=대산 위에 이씨조선 초기의 낙천정이 있었다. 이씨조선 제3대 태종이 왕위를 물러난 후 동쪽 교외 대산에 이궁을 짓고 정자를 꾸몄다 한다.
  ▲ 토정=지금의 토정동이라는 이곳에 토정이라는 기인이 살았기 때문에 오늘날까지 지명으로 전하고 있다. 이즈음에도 음력 정초면 토정비결이라 해서 이를 즐겨 점쳐 보기도하지만 그 비결을 지은 토정은 원명을 이지함이라 하였다.

〈서울의 맥 ‘한강’은 흐른다-한강변의 사적〉, 《서울시보》 제27호, 1982.10.04., 서울특별시

https://archives.seoul.go.kr/item/1071361





〈암사동 선사유적지 시설 준공식〉, 1988.08.30., 서울특별시 공보관

https://archives.seoul.go.kr/item/6177




〈풍납토성 복원〉, 1976.09.17., 서울특별시 공보관

https://archives.seoul.go.kr/item/5786


<한강 연표>
마지막으로 396년 고구려 광개토대왕의 백제 한성을 공격한 일부터 1982년 반포대교 개통까지 한강과 관련된 주요 사건들이 연표로 정리되어 있습니다.
 

◆ 한강 연표

  ▲ 396  고구려군이 한강연안 성 공격, 백제왕도인 한성까지 진격 ▲ 553 한강유역에 신라가 신천(新川) 설치 ▲ 557 신라가 관리행정구획 설치 ▲ 941 한양군을 양주로 개칭  ▲ 1394 이태조 한양천도  ▲ 1397.8 우인열의 왜구 토벌을 위해 출전 격려하는 연회를 용산강에서 베풂 ▲ 1420.5 한강 상류에서 왕과 함께 화포 시험・두모포에서 세종・태종이 왜구 정벌을 떠나는 이종무 등 장수 전송 ▲ 1884 양화진 대신 용산항을 각국 개시장으로 하고 용산~마포 간 길이 30리 너비 10리를 각국인의 공동거주로 함 ▲ 1888.8 용산호와 삼호호의 증기선이 한강에 처음 들어와 인천~마포 간을 운항 ▲ 1912.9 한강 제2철교 상류쪽에 준공 ▲ 1917.10.17 한강인도교 가설 ▲ 1929.4 여의도 비행장 설치 ▲ 1934.8.21 제1한강교 개통 ▲ 1944 한강철교 복선교 완공 ▲ 1948.4.28 서빙고나루터 고양군으로부터 서울시로 편입 ▲ 1950.6.28 광장교 폭파・한강인도교 폭파 10.20 한강철교 개통 ▲ 1951.1.3 서울시민 30만 한강도하 피난, 익사자 60명 4.5 한강교량 복구준공식 6.12 한강철교 개통식 7.1 서울시 행정기구 전부 복귀 ▲ 1952.7.19 한강철교 완전복구 개통식 ▲ 1953.5.25 광장리철교 개통식 ▲ 1953.12.28 한강인도교 보행개통식 ▲ 1954.8.22 한강수중고혼추도식(6・25 당시 수중고혼 위로) ▲ 1956.7.16 호우로 한강범람위기 서울근교 물난리(수위 15.70m) ▲ 1958.5.15 한강인도교 개통 ▲ 1965.1.25 제2한강교 개통 ▲ 1969.12.25 제3한강교 개통 ▲ 1970.5.15 서울대교 완공 ▲ 1972.7.1 잠실대교 완공 ▲ 1973.11.8 영동대교 완공 ▲ 1972.3~6.30 강변6로 개통 ▲ 1976.12 천호대교 개통 ▲ 7.15 잠수교 개통 ▲ 1978.7.22 행주대교 개통 ▲ 1979.10.15 성수대교 개통 ▲ 1979.12.31 성산대교 개통 ▲ 1981.10.25 원효대교 개통 ▲ 1982.6.25 반포대교 개통



1950년대 개발 전의 여의도 전경.
〈서울의 맥 ‘한강’은 흐른다-한강 연표〉, 《서울시보》 제27호, 1982.10.04., 서울특별시

https://archives.seoul.go.kr/item/1071361


이렇듯 오랜 사연을 가진 한강은 여러 차례 개발 과정을 겪으면서 그 모습이 변화하고 낭만을 점차 잃게 되었습니다. 바다 모래사장 못지않게 풍성했던 모래밭은 제방과 아파트 건설로 인해 사라졌고, 수심이 깊어지면서 얼음이 얼지 않는 날이 늘어났습니다. 수질오염으로 인해 수영이나 낚시를 즐기기도 어려워졌습니다. 그러나 시간이 다시 흐르면서 한강은 스스로 옛 모습을 조금씩 되찾아가고 있습니다. 지금까지 줄곧 서울시민들의 휴식공간이 되어주었던 한강은 앞으로도 우리에게 많은 추억을 선물할 것입니다.

서울기록원 《한강, 서울_기억이 흐르다》 전시의 〈달라진 한강의 얼굴〉 파트에서 ‘추억 속의 한강’ 관련 사진과 영상 자료를 확인하실 수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