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장기록 이야기#22] 탑골공원의 조성과 중수
<고려시대 ~ 대한제국>
탑골공원에 대해 알기 위해 고려시대로 거슬러 올라가야 합니다. 고려시대의 국교는 불교로 도심에 사찰을 세웠습니다. 이 중 탑골공원부지에 세웠던 절이 ‘흥복사’입니다. 조선으로 바뀌며 세종 6년 흥복사는 폐사되지만, 세조 대에 이르러 민생안정을 기원하기 위해 흥복사를 ‘원각사’로 확장해 원각사는 도성 안에 가장 큰 규모의 사찰이 되었습니다. 그러나 연산군이 집권하면서 이 사찰을 ‘연방원’이라는 기방으로 사용해 원각사는 사찰의 기능을 상실하게 되어 폐사됩니다. 이후 중종 7년 사찰의 빈터를 사대부와 유랑민이 살 수 있는 민가로 허용해 원각사의 모습이 사라지고 그 터에 사찰의 부속물인 탑만 남아있게 됩니다.
출처 : 조선왕조실록, 국사편찬위원회
https://sillok.history.go.kr/id/kga_11005002_001
https://sillok.history.go.kr/id/kka_10110015_001
그럼 탑골공원 조성 전 탑골부지 모습에 대해 알아볼까요?
이는 이사벨라 버드 비숍이 1894~1897년 4차례에 걸쳐 조선을 방문하고 쓴 기행문인 ‘조선과 그 이웃 나라들’이라는 책에서 살펴볼 수 있습니다.
“700년이 된 대리석 탑이 도시의 불결하고 좁은 길가에 있는 건물의 뒤뜰에 완전히 숨겨있기 때문에 많은 사람이 그것을 볼 수 없다.”
“이 아름다운 탑은 옛날의 절터에 서 있다. 탑은 13층인데, 3개 층은 3세기 전 일본 침략 때 없어졌고, 나머지 손상되지 않는 부분이 남아있다. 그러나 그나마 남아있던 부분은 나의 지난번 방문 때 아이들이 정교한 조각을 떼어 내어 팔고 있었다.”
“그리 멀지 않은 곳에 또 다른 고대 유물이 있다. 이것은 거대한 크기의 화강암 거북의 등에 조각된 비석이 서 있다.”
위의 서술을 보면 탑골공원 내 원각사지 십층석탑, 대원각사비와 묘사가 일치한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이처럼 탑골공원의 원래 모습은 방치된 유물들이 놓여있는 장소에 지나지 않았습니다. 18세기까지 우리나라에 공원은 존재하지 않았으나, 19세기 산업혁명의 흐름과 더불어 뉴욕, 도쿄에 공원이 생기고, 독립신문에도 공원을 조성하자는 논설문이 실리는 등 당시 공원 조성 분위기가 만연했습니다. 이에 고종은 대한제국 경성을 황성으로 조성하기 위한 도시 개조사업을 착수합니다. 영국인 브라운으로 하여금 탑골공원을 현대식 공원으로 조성하기 위해 공원 터에 간단한 울타리를 설치, 황실의 음악 연주소 용도로 ‘팔각정’을 건립, 수목 식재, 원각사지 석탑 주위 하엽석과 난간석을 설치, 대원각사비 둘레에 방형 석지 조성, 주변 평탄화 작업 등 복원작업을 하며 점차 공원의 모습을 만들어 갑니다.
<일제강점기>
1910년 일제에 나라를 빼앗긴 후 탑골공원의 관리권도 총독부 손에 넘어가게 됩니다. 총독부는 벚꽃과 상록수를 심고, 일본식 정자인 사아옥과 벤치, 음악당, 전등, 유리온실 등 시설을 정비해 여러 일본식 건물을 지으며, 공원 환경을 조성해 체류 일본인들의 많은 인기를 끌었습니다. 뿐만 아니라 탑골공원은 3·1운동의 민족정기를 상징하였기에 한국인들에게 중요한 장소로 인식되었습니다. 이에 일제는 어린이 유원지 시설로 재개장하거나 요정(주점) ‘승리’를 공원 내 영업하도록 하고, 화폐정리사업을 추진한 메가타 재정고문 동상을 건립해 역사적 상징성을 훼손하고 탑골공원 폐원을 시도합니다. 1929년부터는 점점 탑골공원 관리에 소홀해지면서 공원은 황폐해졌고, 공원관리권은 1932년 총독부에서 경성부로 이관됩니다. 이후 경성부는 1934년 원각사지 십층석탑을 문화재 제1466호로, 대원각사비를 제1471호로 지정합니다.
(추후 우리나라 문화재보호법에 따라 원각사지 십층석탑은 1962년 국보로, 대원각사비는 1963년 보물로 지정됨.)
<광복 이후(1945~1970년대)>
해방 후 황폐해진 땅을 살리기 위한 노력으로 탑골공원 보수작업이 이루어지게 됩니다. 공원 내 메가타 재정고문 동상을 철거, 한국 내 주둔하고 있던 미 24사단 소속의 공병대의 도움으로 탑골공원 내 바닥에 떨어져 있던 원각사지 십층석탑 상층부 3층 부분을 기중기로 올려 원형을 찾게 됩니다. 1965년 3.1절 맞이 탑골공원에서 행해진 위령제 행사 사진을 보면 복구된 원각사지 석탑과 일제강점기에 지어졌던 음악당의 모습을 찾아볼 수 있습니다. 이후 60년대부터 탑골공원에 3.1운동 기념탑, 의암 손병희 선생 동상이 세워지고, 1967년에는 탑골공원 중수사업을 통해 3.1운동 기념탑을 이전하며 조금씩 오늘날 탑골공원의 모습을 갖추게 됩니다.
<제46회 3.1절 행사>, 1965.3.1, 서울특별시 공보실
https://archives.seoul.go.kr/item/1072
<파고다공원 공사현장>, 1967.9.16, 서울특별시 공보실
https://archives.seoul.go.kr/item/907
<탑골공원중수에따른3.1독립운동기념탑이전승인요청회신>, 《탑골공원중수사업관계철(Ⅱ)》, 서울특별시 산업국 녹지과, 1967.7.24. https://archives.seoul.go.kr/item/1091271
중수작업 중 가장 대표적인 사업은 ‘파고다 아케이드’의 건설입니다. 당시 탑골공원 주변은 무허가 건물이 즐비했습니다. 또한, 매춘지대로 이용되고 있어 1966년에 취임한 제14대 김현옥 서울시장은 ‘도심재개발 사업’의 일환으로 무허가 건물을 철거 또는 이전해 그 자리에 상가 아케이드를 건설을 계획합니다. 이 사업의 영향으로 공원 남서 측에 있는 시립 종로도서관도 철거되고 종로도서관의 부지는 공원용지로 편입되었고, 그 자리에 ‘파고다 아케이드’ 가 세워져 상업지구로 변모합니다. 철거 전 종로 도서관의 외관 및 내부 모습과 파고다 건설 중수 보고서의 내용은 다음과 같습니다.
<1962년 종로도서관>, 1962.12.31, 서울특별시 공보실
https://archives.seoul.go.kr/item/2755
<종로도서관>, 1967.7.21, 서울특별시 공보실
https://archives.seoul.go.kr/item/2756
철거 전 종로도서관의 내부와 외관 모습이다.
<파고다공원개발사업기공보고>, 《탑골공원중수사업관계철(Ⅱ) 》, 서울특별시 환경국 공원과, 1967.4.1.
https://archives.seoul.go.kr/item/1091276
<탑골공원중수계획승인>, 《탑골공원중수사업관계철(Ⅰ)》, 서울특별시 환경국 공원과, 1967.8.2.,
https://archives.seoul.go.kr/item/1092154
지금까지 탑골공원의 조성부터 중수까지 알아보았습니다. 다음 편에는 중수사업을 거쳐 성역화 작업까지의 탑골공원 변천을 소개해드리겠습니다.
<참고 문헌>
- 김해경, 김영수, 윤혜진, 「연구논문 설계도서를 중심으로 본 1910년대 탑골공원의 성립과정」, 『한국전통조경학회지』31권(2호), 한국전통조경학회, 2013
- 김해경, 「탑골공원 기억의 층위에 대한 해석」, 『한국전통문화연구』제14호, 한국전통문화대학교 전통문화연구소, 2014
- 한정훈, 「탑골공원 조성과 이용의 변천과정에 관한 연구」, 서울시립대학교 석사학위 논문, 2004
- 서울특별시 시사편찬위원회 시사편찬위원회 「鄕土서울」 제2호, p111-112자료 및 가람 (이병기) 일기초 참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