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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금요일의 아카이브 #2> 무역보험공사 최유리

<금요일의 아카이브 #2> 무역보험공사 최유리

2017-12-08 서울기록원 조회수 : 286

금요일의 아카이브 두 번째 글은 무역보험공사의 Yuri Choe 님이 보내주셨습니다.
며칠전 퇴근길에 글을 받아 몇 번이나 읽었습니다.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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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록은 목소리를 가져야 하고 그 소리에는 ‘언제, 어디서, 누가, 무엇을, 왜, 어떻게’ 했는가에 대한 이야기가 담겨야 한다.
아카이브란 결국 사람들의 이야기를 담은 기억저장소이기 때문이다. "

- 안정희, 『기록이 상처를 위로한다 : 호모아키비스트, 기록하는 사람들』, 이야기나무, 2015, 17쪽.
 
아키비스트는 다양한 사람들의 삶을 포착하여 기록화하는 데서 나아가, 그들이 자신의 역사를 스스로 써나갈 수 있도록 지원하여야 한다.
 
기록관리에 관심을 갖게 된 것은 어느 한 남자 때문이었다.
‘서울은 만원이다’라는 소설의 제목처럼, 1960년대 서울은 이농현상에 따른 인구집중이 심화되면서, 주택 수가 턱 없이 부족했다.
서울 곳곳에 판잣집들이 우후죽순 생겨났고, 그 주변에는 보금자리를 지키려는 사람들과 그것을 철거하려는 사람들이 있었다.
‘이 선생님’(프라이버시를 위해 ‘이 선생님’이라 칭하겠다.)은 전자였다.
철거민 중에서 유일하게 이름 세 글자가 신문에 나온 사람이었다.
 
당시 ‘1960년대 서울시의 무허가주택 문제’를 주제로 글을 쓰기 위해 자료를 수집하고 있었다.
서울시장 등 철거하려는 사람들이 남긴 기록은 많았지만, 무허가주택 거주민들이 남긴 기록은 찾기 어려웠다.
전자의 기록 속에서 무허가주택 거주민들과 그들의 보금자리는 잠재적 범죄자와 그 소굴처럼 묘사됐다.
서울시경은 그들이 도시와 농촌을 왕래하며 범죄를 전파한다고 생각했고, 서울시ㆍ구청 및 동사무소의 공무원들은 판잣집 일대를 가난하고, 교육적ㆍ문화적 수준이 낮은 사람들을 수용하는 공간으로 인식했다.
그러나 판자촌 주민들을 인터뷰하고 작성한 글에서는 그들을 “농촌을 떠나 생활기회를 찾아와 새롭게 적응을 시작하고 있는 출발자들”로,
그들의 보금자리는 “부지런히 일하고 아껴서 저축하려는 우리 사회의 미래의 희망촌”이라고 표현했다.
 
실제로 무허가주택 거주민들은 어떤 사람들이었고, 판잣집은 그들에게 어떤 의미였을까?
이 선생님을 통해 그 답을 찾고 싶었다. 기사에 따르면, 그는 1961년 당시 마흔 살이었고,
영등포구 본동 국군묘지(현 국립현충원) 근처에 판잣집을 짓고 살고 있었다.
1961년 5월 20일 오전 10시 40분경 구청 직원들이 영등포경찰서 경찰관들을 대동하고 나타나 이 선생님과 그 이웃들의 집을 철거하려고 했다.
이 선생님은 경찰관에 ‘저항’(어느 기사에서는 ‘구타’로, 또 어느 기사에서는 ‘투석’으로 적고 있으나 팩트체크를 할 수 없어 저항이라고 적는다.)했고, 그 과정에서 경찰관 1명이 이마에 전치 2주의 부상을 입었다.
기사 말미에는 이 선생님이 구속되어 21일 군법회의에 회부된다고 적혀 있다.
 
이 선생님은 피의자 진술 시 무슨 이야기를 했을까?
기사에 실명이 나와 있으므로 관련 기관에 수소문하면 금방 기록을 찾을 수 있을 것만 같았다.
몇 번의 전화가 오갔지만, 안타깝게도 맨 마지막에 돌아온 답변은 공소시효에 따라 기록을 보존하기 때문에, 이미 폐기되었을 것이라는 이야기였다.
 
역사는 여러 사람들을 통해 다양한 시각으로 남겨진 기록들이 씨실과 날실처럼 교차하면서 그 시대상을 구성하고 보여준다.
씨실과 날실이 촘촘하게 엮여야 비로소 그 시대를 살았던 사람들의 목소리를 들을 수 있는 것이다.
기록관리 제도화의 산물로서의 아카이브에는 ‘조사ㆍ연구ㆍ검토서’ 따위는 담을 수 있을지언정,
그 너머에 있는 이 선생님과 그 이웃들의 삶의 궤적까지 저장할 수는 없다.
따라서 아키비스트의 시선은 아카이브 밖으로 향해야 한다.
 
아키비스트는 아카이빙의 주체로서 ‘무엇을 기록할 것인가?’라는 질문을 끊임없이 던져야 한다.
그러나 그 대상을 포착한 이후에는 주체가 아닌 관찰자로서, 사람들이 스스로 자신들의 삶을 기록하는 주체가 될 수 있도록 지원해야 한다.
이렇게 만들어진 무수한 씨실과 날실들이 아카이브로 수집될 때, 역사는 ‘말할 수 없었던 사람들’을 호명할 수 있을 것이다.
 

     
사진1: 1969년 정동 판자촌 주민 철거반대 농성
사진2: 1963년 9월 6일 무허가건물 철거현장
출처: 서울사진아카이브 http://photoarchives.seoul.g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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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은 당신을 기억합니다.
서울기록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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