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검색된 결과 89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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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승만 경축행사와 장례
이승만은 대한민국 초대대통령으로 이승만의 생일(03.26)이 오면 마치 국경일처럼 집집마다 태극기가 게양됐고, 전국 곳곳에서는 성대한 경축행사가 벌어졌다. 서울운동장에서의 기념식, 애국가의 작곡가인 안익태 지휘의 특별연주회가 열렸고 서울거리는 꽃전차와 꽃버스가 달렸다. 라디오방송국에서는 특별방송을 내보냈고 3.1절 등의 국경일에만 실시하는 주간 특별송전도 했다. 하지만 1960년 4.19 혁명 후, 하야한 이승만은 90세가 되던 1965년 7월 19일 사망하여 유해는 고국으로 돌아와 가족장을 거쳐 국립묘지에 안장되었다./r/n/r/n* 한국세시풍속자료집성:현대신문편(1946~1970)(국립민속박물관, 2006. p.177~183)/r/n* 한국현대사산책 1960년대편(강준만 저, 인물과사상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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베트남 파병
1964년 일어난 베트남 전쟁에 한국은 미국의 요청으로 1964년 9월11일 1차 파병을 시작했다. 그후 1966년 백마부대와 군수지원단 등 8년간 총 31만 2천853명이 파견되었다. 그 시기 서울시내 퍼레이드 등 대규모 환송행사가 진행되었다. 파병 후 한국은 월남문제에 발언권도 행사 할 수 있었고 미국으로 부터 참전수당과 차관을 받아내게 되었다. 그 중 일부가 경부고속도로 건설에 사용되기도 했다./r/n/r/n* 국방부 군사편찬연구소(www.imhc.mil.kr)/r/n* 위키백과(https://ko.wikipedia.org)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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반공방첩
5.16군사정변 당시 내건 '군사혁명위원회'의 공약 제1조는 '반공을 국시(國是)의 제1의로 삼고 지금까지 형식과 구호에만 그쳤던 반공의 태세를 재정비 강화…”였다. 1960~70년대에 반공이라는 용어는 전 국가적으로 내건 구호였던 것이다. 어디를 가도 '반공방첩만이 우리가 살길이다. 자수하여 광명찾자, 간첩신고는 113…'같은 반공방첩 구호를 확인할 수 있었고, 학교에서는 반공 연설대회·반공 글짓기대회, 반공 포스터 대회 등이 개최되었으며 연일 거리에는 반공 관련 집회시위가 열렸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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민방위 훈련
민방위 훈련은 본래 전쟁으로 인한 재해에 대비하기 위한 민간인의 방호활동이나 오늘날 전쟁 외 각종 재해에도 대처하는 광범한 방호·구조·복구 활동을 포함한다. 민방위 제도가 우리나라에 들어온 때는 한국전쟁 중인 1951년이나 1972년에 매월 15일을 '방공소방의 날'로 정하여 민방공 훈련을 실시하였고, 민방위대는 1975년에 창설되었다. 지금은 공식적으로 매월 15일, 연 8회가 민방위의 날로서 오후 2시부터 약 20분간 경계/공습경보가 울리면 민방위 대피훈련을 해야 한다./r/n/r/n* 두산백과(http://www.doopedia.co.kr)/r/n* 위키백과(https://ko.wikipedia.org)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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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인대회
미인 대회는 참가자 중에서 최고의 미인을 선발하는 대회로 우리나라에서 가장 알려진 미인대회는 한국일보가 주최하는 미스코리아 대회이다. 미스코리아는 한국의 미를 대표하는 사절로서 과거에는 꽤 높은 인기를 누렸으며, 미스코리아 입상 경력을 바탕으로 연예인이 되는 경우도 많았다. 1957년 제1회 미스코리아 선발대회를 시작으로 매년 개최되었으며, 1960년대에는 리틀 미스코리아 선발대회가 더불어 개최되었다. 그리고 1980년에는 미스 유니버스 대회가 서울 세종문화회관에서 열리기도 했다./r/n/r/n* 위키백과(https://ko.wikipedia.org)/r/n* 나무위키(https://namu.wiki)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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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시 새마을운동
근면, 자조, 협동을 기본정신으로 하는 새마을운동은 1969년 11월에 농어촌근대화촉진법이 발표되고, 이어서 1971년부터 시행되기 시작한다. 서울시는 1972년에 매월 1일을 새마을날로 결정하고, 새마을운동의 생활화, 도시새마을운동의 도약 등을 시정목표로 잡기도 했다. 당시 새마을 운동의 주요사업은 가정집 슬레이트 지붕 고치기 및 서양식 현대화 주택 건설, 도시 및 도로 미화 사업, 새마을 지도자 양성 및 교육 등이었다. 5공화국 이후 새마을 운동은 민간 주도로 바뀌며 그 양상이 변화하였다./t/r/n/r/n* 서울행정사(서울시 시사편찬위원회, 1997년)/r/n* 서울육백년사(http://seoul600.seoul.g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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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민합동결혼식
1962년부터 1970년대 후반까지 서울시는 가난해서 결혼을 고민하는 서민들을 위해 일체의 비용을 맡아 주관하는 합동결혼식을 시장 또는 부시장 주례로 거행하였다. 이 합동결혼식은 허식과 낭비를 없애고, 새시대적인 관혼상제의 양식과 습관을 길러 국민경제와 시민생활 개선을 도모하고자 추진되었는데 미리 신청받은 신랑신부를 대상으로 진행되었다. 1962년 당시 제1회 합동결혼식에서 신랑들은 골덴(코듀로이) 국민복을 입었고, 신부들은 한복차림에 흰 면사포를 썼었다. 시에서는 예식장, 신부용 꽃다발과 면사포, 기념사진촬영 등 비용을 부담하였고, 기념품으로 거울 1개씩을 주었다./r/n/r/n* 동아일보(1962.04.18, 3면)/r/n* 경향신문(1962.10.23, 6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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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소, 쓰레기와의 전쟁
1961년 12월 30일 오물청소법 제정으로 서울시 전역이 특별청소구역으로 지정되었다. 서울시는 청소문제를 중시하여 기존의 청소계에서 청소국으로 두 단계를 승격시키고, 각 구청에는 청소과가 신설되는 등 청소행정을 본격화하였다. 1960년대 빠르게 늘어나는 서울시 인구와 함께 쓰레기와 분뇨가 폭발적으로 배출되는 관계로 쓰레기와 분뇨와의 전쟁이 본격화된 것이다. 서울시는 1962년 7월, 미군의 잉여차량 GMC트럭 130대를 대여받아 87대는 쓰레기 수거용, 나머지 43대는 분뇨 수거용으로 개조하여 운행하기도 하였다./r/n/r/n* 서울육백년사(http://seoul600.seoul.g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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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민홀
오늘날 서울 시내의 각 구청 · 동사무소 그리고 전국의 모든 행정관서에서 실시하고 있는 민원서류 즉결의 방식은 서울시가 1968년 8월 5일에 처음 실시한 시민홀이 그 시범이 되었던 것이다. 당시 시민홀은 민원서류만을 취급하는 것이 아니고 각종 상담에도 친절히 응함으로서 명실상부한 상담역의 구실도 한다는 것이다. 시청 소관사항이 아니라도 시민생활과 밀접한 문제, 예컨대 한국전력 소관의 전기며, 또한 체신부 소관의 전화 문제에 이르기까지 상담에 의하여 시민이 알고자하는 사항이나 궁금증을 풀어준다는 것이다. 지금의 다산콜센터와 언뜻보면 비슷한 기능을 한 것처럼 보인다./t/r/n/r/n* 서울육백년사(http://seoul600.seoul.g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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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특별시의회
1948년 8월 정부의 수립과 동시에 지방자치법이 시행되었는데 민선 지방의회를 구성할만한 여건이 조성되지 못했다. 그 후 1956년 8월 13일 시의회의원 선거의 결과 47명의 시의회의원이 선출되어 초대 서울특별시의회가 구성되었다. 이때 정파별 구성은 민주당 40명, 자유당 1명, 농민회 1명, 무소속 5명으로 야당 일색이었다. 제1대 시의회는 1960년 8월 12일 임기만료로 막을 내리고 제2대 서울특별시 의회의원의 선거가 동년 12월 12일에 있었으며, 12월 22일에 개원식을 하였다. 그러나 1961년 5 · 16 군사정변이 일어남과 동시에 시의회가 해산됨으로써 제2대 서울특별시의회는 이렇다할 발자취를 남김없이 해산되었다./r/n/r/n* 서울행정사(서울시 시사편찬위원회, 1997년)/r/n* 서울육백년사(http://seoul600.seoul.g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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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시의 경찰
지금의 서울지방경찰청은 1945년 10월에 창설된 국립경찰에서 시작되었다. 1948년 내무부 소속으로 치안국이 설치되면서 국립경찰은 서울특별시 경찰국으로 개칭되었다. 그로부터 40여년이 지난 1991년이 되어야 내무부 치안본부가 폐지되고, 외청으로 경찰청이 설치되면서 서울특별시 경찰국도 서울지방경찰청으로 개편되었다. 그래서 서울지방경찰청 개편 이전 서울시 경찰은 서울특별시장, 부시장의 지시를 받아 서울시의 치안을 담당했다./r/n/r/n* 서울행정사(서울시 시사편찬위원회, 1997년)/r/n* 서울지방경찰청(http://www.smpa.go.kr)/r/n* 위키백과(https://ko.wikipedia.org)/r/n* 나무위키(https://namu.wiki)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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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시립교향악단
1948년 창단된 서울교향악단을 모체로 둔 서울시립교향악단은 한국전쟁 전후 해산과 재건 등을 거치다가 1957년 9월, 민간주도의 서울교향악단으로 발족하였다. 이후 1960년에 서울시 부시장을 단장으로, 김만복을 상임지휘자로 하는 서울시립교향악단이 전술한 악단들이 주축이 되어 그 활동을 개시하였다. 1960∼1970년대 이들의 돋보이는 활약은 다른 지방도시들에서의 시립교향악단 창설에 모범이 되었고, 지금까지도 KBS 교향악단과 더불어 한국교향악단의 중심이 되어오고 있다./r/n/r/n* 서울육백년사(http://seoul600.seoul.go.kr)/r/n* 나무위키(https://namu.wiki)"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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불량식품 단속과 혼분식 장려
1960~1970년대 서울시는 부정불량식품의 색출과 함께 식품접객업소의 혼분식 장려운동을 강력히 추진했다. 1969년 서울시는 식생활 개선의 달을 정해 매주 수요일과 토요일 오전 11시부터 오후 5시까지 일반음식점에서 쌀을 원료로 한 음식의 판매를 금지시키거나 1979년 서울시내 모든 한정식점에 표준식단제를 부활시켜 10% 이상 혼식으로 공기밥에 반찬 5가지로 제한하여 추가 주문시 별도로 계산토록 소비절약을 추진하는 일도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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방역사업
위생 의식이 높지 않고 위생 시설이 취약했던 1950~70년대에는 전염병 예방을 위해 전염병을 옮기는 모기나 파리 등 해충을 없애기 위한 방역활동이 대대적으로 펼쳐졌다. 특히 해방 이후 미군과 함께 들어온 DDT(디클로로 디페닐 트리클로로에탄)는 값싸고 살충효과도 뛰어나 즐겨 사용되었는데 1960년대엔 손수레, 차량, 비행기까지 동원되어 무차별 대량 살포하기에 이른다. 지금은 DDT 같은 화학살충 성분의 유해성이 세상에 알려지며 친환경적인 분무 방역이나 천적을 이용하는 방식으로 바뀌었다./r/n/r/n* 서울행정사(서울시 시사편찬위원회, 1997년)/r/n* 내 손안에 서울(http://mediahub.seoul.go.kr)/r/n* 국가기록원(http://www.archives.g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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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60년대 보건소
서울시의 보건위생분야의 실무를 크게 담당하였던 보건소는 1961년 당시에는 종로, 중구, 용산, 동대문, 성동, 성북, 서대문, 마포, 영등포보건소 등 9개가 있었다. 보건소 사업은 주로 시민 보건의 예방적 차원에서 사업을 전개하기 시작하여 건강상담, 환자진료, 가족방문, 보건교육사업 및 이에 따른 각종시험 · 검사 등 사업을 실시하였다. 또한 대한결핵협회가 서울시내 국민학생 45.2%가 결핵에 감염되었다고 발표한 1960년대에는 보건소가 결핵환자 치료에도 앞장서기도 하였다./r/n/r/n* 서울행정사(서울시 시사편찬위원회, 1997년)/r/n* 서울육백년사(http://seoul600.seoul.g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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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3한강교(한남대교)
용산구 한남동에서 강남구 신사동을 연결하는 교량이다. 제3한강교는 서울과 부산을 연결하는 경부고속도로 진입 역할을 하는 다리로서 경부고속도로 계획과 더불어 착공된 한강 위의 4번째 교량이다. 건설 당시에는 제3한강교라 불렀으나 1985년 한강종합개발사업으로 한강 위에 놓인 다리 이름을 정리하면서 한남대교로 바꾸었다. 1966년 1월 19일에 착공하여 4년만인 1969년 12월 25일에 완공하였다. 한남대교는 서울 강남지역의 대규모 개발시대를 열게 한 중요한 다리이다./r/n/r/n* 서울지명사전(서울시 시사편찬위원회, 200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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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2한강교(양화대교)
제2한강교는 서울의 서부 관문으로서 한강 위의 3번째 교량이다. 강북의 마포구 합정동과 강남의 영등포구 당산동을 연결하는 이 다리는 1962년 6월 20일 착공하여 1965년 1월 25일에 준공하였다. 한강대교만으로는 격증하는 서울시내의 교통량을 수용하기 곤란한 실정에 이르러 한강하류에 이 다리를 증설하였던 것이다. 다리가 가설된 후 제2한강교라 부르다가 한강종합개발계획과 더불어 다리 이름을 변경하였는데, 조선시대 양화나루가 있었기 때문에 양화대교라고 하였다./r/n/r/n* 서울지명사전(서울시 시사편찬위원회, 200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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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한강교(한강대교)
서울특별시 용산구 한강로 3가와 동작구 본동(노량진) 사이를 잇는 총연장 1,005m의 한강 위에 놓인 최초의 인도교이다. 1917년에 준공된 이 다리는 1950년 한국전쟁 당시 국군에 의해 폭파되었고, 서울 수복 후 부교 또는 가교가 놓여졌다. 그 후 1958년 5월 15일에야 완전 복구되었다. 제1한강교라고도 불리었던 이 다리는 서울의 인구와 교통량이 크게 증가됨에 따라 1979년 1월에 4차선 교량을 8차선 교량으로 확장하는 공사가 시작되어 1981년 12월에 완공되었다. 그 결과 쌍둥이 교량으로 탈바꿈되면서, 이름도 ‘한강인도교’에서 ‘한강대교’로 개칭되었다./r/n/r/n* 서울지명사전(서울시 시사편찬위원회, 200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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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강의 다리
1960년대 후반에 들어서면서 서울은 한강개발사업이 활발히 진행되었다. 1960년까지 한강 상에는 제1한강교와 광진교 밖에 놓여 있지 않았다. 1965년에 완공을 본 제2한강교(양화대교)를 시작으로 1969년 제3한강교(한남대교), 1970년 서울대교(마포대교)가 완공되었다. 이는 민족의 심장부인 서울을 강남과 강북으로 연결시켜 강북의 인구를 강남으로 분산시키고자 하는 의도가 있었다. 이후 복구와 신설 공사가 계속되어 현재 27개의 한강대교와 4개의 철교가 한강을 가로지르고 있다. /r/n/r/n* 서울행정사(서울시 시사편찬위원회, 1997년)/r/n* 서울육백년사(http://seoul600.seoul.g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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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강 주변 변경
전후 끊겼던 다리가 재건 되기 시작하면서 한강주변 정비가 시작되고, 무허가 주택들의 철거도 이루어 졌다. 1970년 잠실지역이 개발되어 육지와 연결되었고, 한강주변에 공원조성 사업도 진행되었다. 산업화에 의한 수질악화로 수질 개선사업이 진행되었고 1986년 한강유람선이 개통 되었고 수상레저 스포츠 지역으로도 활용되고 있다./r/n/r/n* 서울특별시 한강사업본부 (http://hangang.seoul.go.kr/)/r/n* 위키백과(https://ko.wikipedia.org)"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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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강 수해
1960년대 전반기 까지는 일제시대에 축조된 제방이 한강의 수해대비 역할을 했다. 그러던 것이 1963년 행정구역 확장과 함께 1968년 한강개발 3개년 계획에 의해 제방건설과 강변도로 건설이 이루어 졌다. 그 이전까지 한강변은 주택이 침수되는 등의 피해가 빈번했다. 특히, 1959년 태풍 사라와 1972년 태풍 베티에 의해 수많은 이재민과 사상자 재산 피해가 발생했다. 2008년부터 2012년까지 사업비 22조원의 4대강 사업의 목적중 하나도 수해방지에 있다./r/n/r/n* 서울특별시 한강사업본부 (http://hangang.seoul.go.kr/)/r/n* 서울행정사(서울시 시사편찬위원회, 1997년)/r/n* 위키백과(https://ko.wikipedia.org)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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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계천
서울 4대문 안의 한복판을 서에서 동으로 흐르는 청계천은 일제강점기 이래 전면 복개되면서 사실상 하천의 기능을 상실하였었다. 청계천 복개공사는 일제강점기나 1955년 일부 이루어졌지만 복개공사가 본격적으로 이루어진 것은 1958년부터 1978년까지 구간을 나눠서 진행되었다. 그리고 서울시는 아현고가도로 건설의 경험을 살려 1967년 청계고가도로(당시 3.1도로)를 착공하여 1971년에 완공하였다. 공사 당시 청계천 주변의 판잣집들은 복개과정에서 철거되고, 그 자리에는 맨션이나 상점가가 건설되었다. 이 과정에서 청계천 주변에 살던 많은 사람들은 봉천동, 신림동, 상계동, 광주대단지(지금의 성남시) 등으로 강제로 이주당했다. 1990년대 들어 청계천 복개 구조물과 청계고가도로의 안전문제가 대두되자 서울시는 2003년 청계고가도로 철거를 시작으로 청계천 복원사업을 대대적으로 진행하였고, 2005년 시민들에게 청계천을 공개하였다./r/n/r/n* 서울행정사(서울시 시사편찬위원회, 1997년)/r/n* 서울육백년사(http://seoul600.seoul.g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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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앙청
중앙청은 정부수립 이후 대통령 집무실을 비롯한 주요 행정부처가 자리를 잡은 정부청사였다. 원래 중앙청은 1926년 완공된 조선총복부 청사로 한국전쟁 이후 군정청으로 사용되면서 처음으로 중앙청이라 불리게 되었다. 제3공화국에 들어서 대통령 집무실을 없애고, 중앙행정부서가 종합청사와 과천정부청사 등으로 분산되어 행정부의 중심부라는 뜻에서의 중앙청 기능은 소멸되어 갔다. 이후 일제침략의 상징적 건물에서 주요 정부기관으 집무실로 사용할 수 없다는 여론에 따라 1986년 국립중앙박물관으로 개조하여 사용되다가 1995년 김영삼 대통령의 '역사 바로 세우기'의 일환으로 지붕의 첨탑만 남겨둔 채 철거했다./r/n/r/n* 한국민족대백과(http://encykorea.aks.ac.kr) /r/n* 두산백과(http://www.doopedia.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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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충체육관
1955년 개관한 육군체육관은 당시 노천체육관으로 대한민국 최대 규모를 자랑했던 체육관이었다. 이후 1959년 서울시가 운영을 맡으면서 본격적인 경기장으로 개보수하였는데 1963년 국내설계로 지은 대한민국 최초 돔 경기장으로 개장하였다. 장충체육관에서는 농구, 배구, 복싱, 프로레슬링, 씨름 등 각종 실내 스포츠 경기들이 열렸을 뿐만 아니라 대형문화공연도 자주 열렸다. 특히 서울 올림픽 대회 때는 유도와 태권도 경기장으로 사용되었다. 한편 이 체육관은 정치적인 측면에서도 의미있는 장소이다. 박정희(1972년, 1978년), 최규하(1979년), 전두환(1980년) 세명의 대통령이 통일주체국민회의 대의원의 간접선거로 선출된 곳으로 일명 '체육관 선거'의 체육관이 바로 장충체육관이다./r/n/r/n* 서울육백년사(http://seoul600.seoul.go.kr)/r/n* 한국민족대백과(http://encykorea.aks.ac.kr) /r/n* 두산백과(http://www.doopedia.co.kr)/r/n* 위키백과(https://ko.wikipedia.org)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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육교
서울에서 보도육교가 사라지고 있다. 1999년 서울의 보도육교는 250개였던 것이 2014년에는 166개로 줄었다. 육교가 사라지는 데는 자동차 중심의 차로 정책이 보행자 위주로 바뀐 게 가장 큰 배경이 되고 있다. 임신부나 노약자, 휠체어 장애인 등 교통약자가 이용하기 힘들다는 민원과 사람들의 인식이 바뀌면서 육교를 없애고 횡단보도를 설치하는 분위기가 퍼지고 있는 것이다. 1970~80년대 경쟁적으로 건설된 육교들이 설치된 지 수십년이 지나면서 노후화가 진행돼 미관상으로도 좋지 않고 유지·보수에도 어려움이 많다./r/n/r/n* 연합뉴스(2015.10.0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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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동네의 옛 모습
과거 우리동네의 모습은 어떠했을까? 자그마한 뒷산과 포장되지 않은 신작로 빨래하던 개천이 있는 동네가 서울에 많았다. 뒷산은 달동네로 바뀌고 이후 재개발로 아파트가 들어서고, 신작로는 자동차들이 가득 들어섰다. 점차 개발되어가는 우리동네의 모습들을 보면서 작은 과거의 흔적이나 향수를 찾아 볼수도 있지 않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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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의도광장
1999년 지금의 여의도 공원이 조성되기 전에는 여의도 광장이 있었다. 1970년대 한강 일대를 개발의 일환으로 1971년 만들어진 아스팔트 광장인 여의도 광장(당시 명칭 5.16 광장)은 평상시에는 유신 선전을 위한 대광장으로 사용되었다가 제5공화국에서도 '국풍81'같은 각종 국내, 국제 행사를 개최하는 대표적인 곳이 되었다. 요한 바오로 2세도 방한시 이 곳에서 미사를 집전하였으며, '이산가족을 찾습니다'라는 역사가 일어나기도 했다. 1970~80년대 국군의 날에는 대규모 군사 퍼레이드가 개최되기도 했다. 하지만 1987년 6월 항쟁 이후, 한강 백사장에 이어 대통령 후보들이 세를 결집하는 유세장이 되기도 했다./r/n/r/n* 위키백과(https://ko.wikipedia.org)/r/n* 나무위키(https://namu.wiki)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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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의도
한강 흐름의 한복판에 넓게 퍼진 백사장, 소수의 주민이 채소를 가꾸며 살았고, 일제 때부터 비행장으로 사용되었던 여의도에 1967년 12월 윤중제(輪中堤) 공사가 시작되어 연인원 40만명이 동원된 이 거대한 역사가 준공된 것은 1968년 6월 1일이었다. 1970년에 서울대교, 1981년에 원효대교가 완성됨으로써 여의도가 서울에서 차지하는 비중은 더욱 높아졌는데 현재 여의도공원을 중심으로 서쪽에 국회의사당·KBS본관 등이, 동쪽에는 전국경제인연합회·증권거래소·아파트군이 자리잡고 있다./r/n/r/n* 서울육백년사(http://seoul600.seoul.go.kr)/r/n* 한국민족대백과(http://encykorea.aks.ac.kr) /r/n* 서울지명사전(서울시 시사편찬위원회, 200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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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의 옛 거리들
도시재건 사업과 근대화 추진으로 도심의 거리들은 빠르게 변했고, 변두리 지역도 도로 정비와 1970년대 이후 재개발을 진행하면서 변모해 갔다. 1963년 남대문 지하도가 개통되었고, 도심거리에 육교도 건설되었다. 1966년 당시 대한항공 앞과 신세계 앞 육교 개통식에는 체험해 보려는 시민들이 몰려 북새통을 이루기도 했다. 또한 그해 서소문 고가다리도 개통을 하는 등 도로의 모습도 많이 바뀌어 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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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역(문화역서울284)
서울역은 서울시 중구 봉래동과 용산구 동자동에 있는 기차역 및 지하철역으로 1900년 영업을 개시한 대한민국의 수도 서울의 대표적인 관문이다. 과거에는 경부선 외에도 호남선·전라선·장항선 등 모든 장거리 열차가 운행되었으나 2004년 4월 KTX가 개통된 뒤부터 호남선·전라선·장항선은 용산역에서 출발하게 되었다. 한편 1925년 준공된 구 서울역사는 사적 제284호로 문화재적 가치가 높으며, 2003년 신역사 준공으로 역사(驛舍)의 용도로 사용하지 않게 되면서 2011년 '문화역서울 284'라는 새이름으로 개장하였다./r/n/r/n* 문화역서울 284(http://www.seoul284.org)/r/n* 두산백과(http://www.doopedia.co.kr)/r/n* 위키백과(https://ko.wikipedia.org)"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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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시청 앞 광장
서울시청 앞 광장은 도심 한가운데 위치하고 있으며 주변에 역사문화자원들이 산재하여 국가적 상징성 및 역사성을 지닌 장소이다. 또한 서울시청 앞 광장은 고종보호 시위, 3.1운동, 4.19혁명, 한일회담 반대시위, 6월항쟁에 이르기까지 한국 근현대사의 한 획을 긋는 역사적 사건의 주요무대가 되었다. 2002년 월드컵을 계기로 시청 앞 광장이 응원의 메카로 부각되면서 시민결집과 커뮤니케이션 공간의 필요성이 확산되었고, 마침내 2004년 5월 1일 지금의 서울광장이 조성되어 많은 시민들이 광장을 이용하고 있다./t/r/n/r/n* 서울특별시 서울광장(http://plaza.seoul.g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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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대공원
서울대공원은 경기도 과천시에 위치한 서울시 관할의 시립공원이다. 서울대공원의 역사는 일제시기로 거슬러 올라가는데 창경궁 내에 동물원과 식물원을 만들면서 공원으로 조성하고, 이름도 창경원으로 바꿨다. 광복 이후에도 상당히 오랜기간 창경원으로 활용되다가 창경궁 복원에 대한 여론이 높아지자 1978년 창경원 시설 중 동물원과 식물원을 과천에 이전하는 계획이 수립되었고, 1979년에 착공하여 1984년에 동물원을, 1985년에 식물원을 연달아 개장하였다. 착공 당시에는 '남서울대공원'이라는 이름이 붙었으나 완공 후 지금의 서울대공원으로 확정되었다. 서울대공원은 1988년 개장한 놀이공원인 서울랜드와 더불어 서울·수도권 시민들의 일일 나들이 장소가 되었다./r/n/r/n* 서울육백년사(http://seoul600.seoul.go.kr)/r/n* 위키백과(https://ko.wikipedia.org)/r/n* 나무위키(https://namu.wiki)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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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직공원
서울 종로구 사직동에 위치한 사직공원은 조선 태조가 한양에 수도를 정하고 경복궁, 종묘를 지을 때 함께 지은 사직단(사적 제121호)이 있는 곳으로 일제시기인 1920년대 민족혼 말살 정책의 일환으로 사직단 주변이 공원으로 조성되었다. 1960년대에 사직터널이 개통되고, 사직공원과 독립문간 도로가 확장되면서 사직단 정문(보물 제177호)은 원래의 위치에서 14m 뒤로 이전하였고, 1968년에는 국제규격의 사직파라다이스 수영장이 개장되었다. 그리고 비슷한 시기에 사직공원 내에 단군전, 사직단 기념관, 시립종로도서관 등이 건립되었다. 사직단 관리는 종전 서울시 종로구청에서 담당했으나 사직단의 신성성 회복 및 역사적 가치 복원을 위해 2012년부터 문화재청에서 직접 관리하고 있다./r/n/r/n* Visit Seoul(http://www.visitseoul.net)/r/n* 두산백과(http://www.doopedia.co.kr)/r/n* 위키백과(https://ko.wikipedia.org)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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명동 거리
명동은 서울 중구에 있는 번화가이자 지역 이름이다. 조선시대에는 '명례방', '남촌'이라고 불리며 주로 가난한 선비들이 모여사는 주택가였으나 현대와 같은 대규모 상업지구로 바뀐 것은 일제강점기 일본인 거주지가 들어서면서부터이다. 명동은 1970~80년대까지만 해도 한국의 월스트리트라고 해도 과언이 아닐 정도로 증권회사가 모여 있는 한국경제의 중심지였으며, 수많은 음악감상실·화랑·소극장 등이 있어 문화예술인들의 집결지이기도 했다. 한편 명동은 대한민국에서 가장 땅값(공시지가)이 비싼 지역으로도 알려져 있어 명동의 부동산·상업적 가치는 여전히 높다./r/n/r/n* Visit Seoul(http://www.visitseoul.net)/r/n* 한국민족대백과(http://encykorea.aks.ac.kr) /r/n* 두산백과(http://www.doopedia.co.kr)/r/n* 위키백과(https://ko.wikipedia.org)/r/n* 나무위키(https://namu.wiki)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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흥인지문(동대문)
1398년(태조 7년)에 완성된 흥인지문은 서울 도성의 사대문 중 동쪽에 있다하여 동대문이라 불리고 있다. 또 흥인지문은 사대문중 유일하게 옹성을 두르고 있는 것이 특징이다. 흥인지문은 태조 5년(1396) 9월 건설되어 현재까지 수차에 걸친 수축과 개축이 있었으나 그 원형만은 현재까지 보전되어 1963년 보물 제1호로 지정되었다. 주변에 동대문디자인플라자(DDP, 과거 동대문운동장 터), 동대문시장 등이 사람들의 발길이 끊이지 않았다./r/n/r/n* 대한민국 구석구석(한국관광공사, 2013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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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립서울현충원
국립서울현충원은 서울시 동작구에 있는 국립묘역이다. 1955년 국군묘지로 창설되어 1965년 국립묘지로 승격되었다. 그 후 1996년 국립현충원으로 명칭이 변경되었다가 2006년부터 지금의 국립서울현충원으로 변경되었다. 이곳 성역에서는 구한 말 의병부터, 독립지사, 국가유공자, 국군 장병과 경찰관 등 165,000여 순국선열과 호국영령들이 애국지사 묘역, 임정요인 묘역, 국가 유공자 묘역, 장병묘역, 경찰 묘역으로 나뉘어 잠들어 있다. 이곳 현충원에서는 매년 6월 6일 현충일에 거국적인 추념행사가 거행되고 있으며, 서울시장 등 주요 인사들은 새해를 맞이하거나 부임할 때에도 자주 묘역을 찾았다./r/n/r/n* 국립서울현충원(http://www.snmb.mil.kr)/r/n* 두산백과(http://www.doopedia.co.kr)/r/n* 위키백과(https://ko.wikipedia.org)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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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남 고속터미널
서울시민들이 흔히 말하는 강남고속버스터미널은 반포동에 있는 서울고속버스터미널을 말한다. 1975년 당시 서울시는 도심 집중을 완화하고 강남을 개발하기 위해 종합버스터미널 계획을 세우고, 1977년 도심에 산재해 있던 고속버스 터미널을 반강제로 이곳에 이전시켰다. 그 전까지만 해도 광주·중앙·동부·한일·천일고속은 동대문터미널에서, 그레이하운드·한진·동양고속은 서울역 앞에서, 삼화고속은 종로2가에서, 유신고속은 초동에서, 충청도·전라도 행 시외버스는 용산역 앞에서 출발하였다. 현재 쓰이고 있는 삼각형 모양의 건물은 1979년 신축 계획을 확정하여 건설하기 시작해 하차장은 1980년에, 본관은 1981년에 완공되었다./r/n/r/n* 서울고속버스터미널(http://www.exterminal.co.kr)/r/n* 한국민족대백과(http://encykorea.aks.ac.kr) /r/n* 두산백과(http://www.doopedia.co.kr)/r/n* 위키백과(https://ko.wikipedia.org)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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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21대 서울시장 김용래
제21대 서울특별시장 김용래는 경기도지사, 총무처 장관도 역임한 행정가이었다. 그는 재임기간(1987.12.30.~1988.12.04.) 동안 88서울올림픽 성공적 개최를 위해 최선을 다했으며, 상수도 공급, 청소, 주택공급, 복지시설 확충 등 서민생활보호대책을 추진하였으며 푸른 서울가꾸기 2차 5개년 계획을 수립 및 추진하였다./r/n/r/n* 서울육백년사(http://seoul600.seoul.go.kr)/r/n* 서울시청(http://www.seoul284.org)/r/n* 나무위키(https://namu.wiki)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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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20대 서울시장 염보현
제20대 서울특별시장 염보현은 경찰 출신으로 경기도 도지사를 역임하기도 하였다. 그는 재임기간(1983.10.15.~1987.12.29.) 동안 지하철 2 3 4호선 완공, 한강종합개발 추진, 가락동 농수산물시장 개장, 목동신시가지 건설, 경희궁·보라매·종묘공원·석촌호수 등 공원계획을 수립 및 추진하였다. 또한 그는 성공적으로 아시아경기대회를 개최하고, 88서울올림픽 대회를 실질적으로 준비하는 데 큰 역할을 하였다./r/n/r/n* 서울육백년사(http://seoul600.seoul.go.kr)/r/n* 서울시청(http://www.seoul284.org)/r/n* 나무위키(https://namu.wiki)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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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9대 서울시장 김성배
제19대 서울특별시장 김성배는 강원도청 주사로 출발해서 지방행정의 최고위직이라 할 수 있는 서울시장에까지 오른 입지전적 인물로 나중에 건설부장관 등을 역임했다. 그는 서울시장 재임기간(1982.04.28.~1983.10.14.) 동안 지하철 2호선 종합운동장∼교대간과 을지로입구∼성수역간을 개통하였고, 86아시안게임과 88서울올림픽 준비를 위해 종합운동장과 야구장을 완공하고, 주경기장 건설을 추진하였다./r/n/r/n* 서울육백년사(http://seoul600.seoul.go.kr)/r/n* 서울시청(http://www.seoul284.org)/r/n* 매일경제(1982.04.29. 2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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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8대 서울시장 박영수
제17대 서울특별시장 정상천은 강원도지사, 해양수산부 장관, 국회의원, 자민련 부총재 등을 역임한 정치인이다. 그는 서울시장 재임기간(1978.12.22.~1980.09.01.) 동안 도시의 기능 시설을 배치하여 능률을 제고하고, 가로 구조물을 정비하였으며, 청소행정의 혁신, 도시가스시설 확충 및 의료보험의 확대 등 서민생활안정 종합대책을 추진하였다. 또한 그는 영세민 취업을 위한 직업알선센터을 운영하고, 에너지 10%절약운동으로 제2의 석유파동 대처하는 시정활동을 벌였다./r/n/r/n* 서울육백년사(http://seoul600.seoul.go.kr)/r/n* 서울시청(http://www.seoul284.org)/r/n* 위키백과(https://ko.wikipedia.org)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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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7대 서울시장 정상천
제17대 서울특별시장 정상천은 강원도지사, 해양수산부 장관, 국회의원, 자민련 부총재 등을 역임한 정치인이다. 그는 서울시장 재임기간(1978.12.22.~1980.09.01.) 동안 도시의 기능 시설을 배치하여 능률을 제고하고, 가로 구조물을 정비하였으며, 청소행정의 혁신, 도시가스시설 확충 및 의료보험의 확대 등 서민생활안정 종합대책을 추진하였다. 또한 그는 영세민 취업을 위한 직업알선센터을 운영하고, 에너지 10%절약운동으로 제2의 석유파동 대처하는 시정활동을 벌였다./r/n/r/n* 서울육백년사(http://seoul600.seoul.go.kr)/r/n* 서울시청(http://www.seoul284.org)/r/n* 위키백과(https://ko.wikipedia.org)"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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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6대 서울시장 구자춘
제16대 서울특별시장 구자춘은 육군 군인과 경찰 출신으로 내무부 장관, 제13, 14대 국회의원도 역임하였다. 그는 서울시장 재임기간(1974.09.02.~1978.12.21.) 동안 도시새마을 운동의 약진과 함께 서민주택을 건설하고, 서민생활 보호 등 서민생활 보호를 위한 시책을 추진하였다. 또한 그는 도시건설의 내실화를 위해 도시 기간시설을 설치하고, 각종 생활환경시설의 확충 및 불량지구 재개발을 추진하는 등 시정활동을 벌였다./t/r/n/r/n* 서울육백년사(http://seoul600.seoul.go.kr)/r/n* 서울시청(http://www.seoul284.org)/r/n* 위키백과(https://ko.wikipedia.org)"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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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5대 서울시장 양택식
제15대 서울특별시장 양택식은 경남부지사, 철도청장, 경북지사 등을 역임했다. 그는 서울시장 재임기간(1970.04.16.~1974.09.01.) 동안 20년간의 도시기본계획과 계획구역내 6개 지역지구에 대한 건축제한 방침을 정하는 장기계획 등을 수립하고, 영동지구 구획정리사업 등 기본계획을 확정하였으며, 무허가 건물 정리 10개년 계획 및 인구 분산계획 수립하는 등 활발하게 시정을 펼쳤다./t/r/n/r/n* 서울육백년사(http://seoul600.seoul.go.kr)/r/n* 서울시청(http://www.seoul284.org)/r/n* 위키백과(https://ko.wikipedia.org)"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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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4대 서울시장 김현옥
제14대 서울특별시장 김현옥은 부산직할시장, 내무부장관을 지낸 공무원이다. '불도저'라는 별명을 갖고 있던 그는 서울시장 재임기간(1966.03.31.~1970.04.15.) 동안 세종로, 명동 등 지하도 개설, 자동차 전용 입체고가도로 건설 및 주요 간선도로 확장 포장, 세운상가·파고다 아케이드·낙원상가 등 도심재개발 사업 추진, 한강개발사업, 남산1·2호 터널 개통, 400여동의 시민아파트 건설, 영동1·2지구·화양 망우지구·시흥 신림지구 등 대규모 구획정리사업 추진하는 등 서울의 지도를 바꿀 정도로 활발한 활동을 보였다. 하지만 1970년 와우아파트 붕괴사고의 책임을 지고 사임하였다./t/r/n/r/n* 서울육백년사(http://seoul600.seoul.go.kr)/r/n* 서울시청(http://www.seoul284.org)/r/n* 위키백과(https://ko.wikipedia.org)"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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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3대 서울시장 윤치영
제13대 서울특별시장 윤치영은 이승만 대통령의 비서실장, 대한민국 초대 내무부 장관 등을 역임한 정치인이자 언론인이었다. 그는 서울시장 재임기간(1963.12.17.~1966.03.30.) 동안 구로·숭인·은평·뚝섬 등 4개 지구 4천만평에 대한 도시계획을 수립하였고, 제2한강교(양화대교)을 준공하고, 제3한강교(한남대교)을 착공하였으며, 서울시 최초의 장기계획인 '시정10개년 계획'을 수립하였다./r/n/r/n* 서울육백년사(http://seoul600.seoul.go.kr)/r/n* 서울시청(http://www.seoul284.org)/r/n* 위키백과(https://ko.wikipedia.org)"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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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2대 서울시장 윤태일
제12대 서울특별시장 윤태일은 일제강점기의 군인이며, 대한민국의 군인과 정치인이기도 하였다. 1961년 5.16 군사정변에 참여하였으며 현역 군인의 신분으로 서울특별시장을 역임하였다. 그는 서울시장 재임기간(1961.05.20.~1963.12.16.) 동안 '서울특별시행정에관한특별조치법' 제정으로 중앙관장사무가 대폭 이양되고, 행정기구의 대폭적인 개편이 실시되었다. 또한 그는 인구 500만을 기준으로 한 도시계획사업을 추진하고, 교외지역 발전에 중점을 두고 상하수도 완비 등 사회기반시설을 확충하고자 하였다./r/n/r/n* 서울육백년사(http://seoul600.seoul.go.kr)/r/n* 서울시청(http://www.seoul284.org)/r/n* 위키백과(https://ko.wikipedia.org)"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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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1대 서울시장 김상돈
제11대 서울특별시장 김상돈은 반민족행위특별조사위원회 부위원장과 4대와 5대 민의원직 등을 역임했다. 그는 4.19 혁명 이후, 처음으로 실시된 서울시장 직접선거에서 당선된 최초의 민선시장이었으나 5.16 군사정변으로 인해 시장직을 사퇴하여 실제 재임기간은 5개월이 채 되지 않는다. 그의 서울시장 재임기간(1960.12.30.~1961.05.16) 동안 건전재정을 도모하고, 부정에 일벌백계를 실시함으로서 공직기강을 확립하였으며, 도심지 교통량 분산과 각종 공장과 창고의 교외이전 정책을 추진하였다./r/n/r/n* 서울육백년사(http://seoul600.seoul.go.kr)/r/n* 서울시청(http://www.seoul284.org)/r/n* 위키백과(https://ko.wikipedia.org)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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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0대 서울시장 장기영
제10대 서울특별시장 장기영은 대한민국 독립운동가, 외교관, 정치인이었다. 그의 서울시장 재임기간(1960.05.02.~1960.06.30)은 두 달이 채 되지 않았는데 중부병원을 일반병원으로 활용하고, 부속 결핵요양소 신설,/r/n23개 동의 오물수거 지역 확장 및 50개소의 공동우물 설치, 노동회관을 보건복지부로부터 인수운영하는 시책을 추진했다./r/n/r/n* 서울육백년사(http://seoul600.seoul.go.kr)/r/n* 서울시청(http://www.seoul284.org)/r/n* 위키백과(https://ko.wikipedia.org)"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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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9대 서울시장 임흥순
제9대 서울특별시장 임흥순은 대한민국 제2대, 3대 국회의원을 역임하였었다. 그의 서울시장 재임기간(1959.06.12.~1960.04.30.) 동안 청계천 암거공사와 용산구∼성동구∼동대문구∼성북구 ∼의정부간 순환도로 건설을 추진하고, 1960년 아시아 축구대회에 대비하여 효창운동장에 축구장을 개설하였으며, 4개 보건소 청사 신축 및 공중변소 공동우물, 공중목욕탕을 증설하는 등 활동을 보였으나 4.19 혁명 이후 사퇴하였다./r/n/r/n* 서울육백년사(http://seoul600.seoul.go.kr)/r/n* 서울시청(http://www.seoul284.org)/r/n* 위키백과(https://ko.wikipedia.org)"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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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8대 서울시장 허정
제8대 서울특별시장 허정은 대한민국의 독립운동가이며 정치인으로 1960년 4.19 이후 내각수반과 대통령 권한대행을 지냈다. 그는 서울시장 재임기간(1956.12.14.~1959.06.11) 동안 우회도로 정비 및 보도의 대대적인 포장 실시, 주택난 해소를 위해 120만평의 미아리지구 택지조성 방안 마련 , 시립종합병원과 보건소 개방 및 방역 위생사업소 운영, 마장동 도축장 완공 등 시책을 추진했다./r/n/r/n* 서울육백년사(http://seoul600.seoul.go.kr)/r/n* 서울시청(http://www.seoul284.org)/r/n* 위키백과(https://ko.wikipedia.org)"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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KAL기 폭파사건
1987년 이라크 바그다드에서 출발한 대한항공 여객기가 인도양 상공에서 실종된 사건으로 KAL기 (폭파)사건이라고 불린다. 사건 당시 대한민국 정부는 북한이 88서울올림픽대회 개최를 방해하고 대통령 선거의 혼란을 야기시키기 위해 '북한지령에 의한 공중폭발'로 결론짓고 사건조사를 마쳤다. 당시 KAL 폭파사건에 대한 국민들의 분노는 대단해서 연일 반공시위가 열렸으며, 이 사건으로 북한은 2008년 9월까지 미국의 테러 지원국 명단에 올랐다./r/n/r/n* 두산백과(http://www.doopedia.co.kr)/r/n* 위키백과(https://ko.wikipedia.org)"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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존슨 미 대통령 방한
1966년 존슨 미 대통령의 방한으로 서울 전체가 떠들썩 했다. 한국의 베트남 전쟁 참전 등으로 한미동맹이 어느 때보다 돈독한 시기였다. 당시 기사에 의하면 180만 정도의 국민들이 환영대회에 참석했으며, 이를 본 존슨 대통령도 '세계 여러 나라를 다녔어도 이런 환영은 처음'이라고 할 정도였다. 서울시는 환영대회를 준비하며 '피켓경연대회'까지 개최했다./r/n/r/n* 동아일보(1966.10.27, 7면)/r/n* 동아일보(1966.10.31, 1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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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산가족을 찾습니다
KBS 특별생방송 '이산가족을 찾습니다'는 1983년 6월 30일부터 11월 14일까지 138일간 방송된 세계 최초, 최대 규모의 이산가족찾기 프로그램이다. 당초 1시간 30분 가량 방송될 예정이었지만 이산가족을 찾기 위해 여의도 방송국 앞으로 몰려드는 사람들 때문에 138일 동안 릴레이 생방송을 이어가며 이름 없는 이산가족들이 겪어야 했던 구구절절한 사연들이 생생하게 영상으로 전달되었다. 이 방송기록물은 2015년 유네스코 세계기록유산으로 등재되었다./t/r/n/r/n* 두산백과(http://www.doopedia.co.kr)/r/n* 위키백과(https://ko.wikipedia.org)/r/n* 나무위키(https://namu.wiki)/r/n* 경향신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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월남귀순자 환영회
한국 전쟁 이후, 북한을 탈출하여 남한에 귀순한 탈북자를 1962년 '국가유공자및월남귀순자특별원호법'이 제정되면서 '월남귀순자'로 부르며 국가유공자에 준하는 처우를 하였다. 1978년 '월남귀순용사특별보상법'이 제정되면서 '월남귀순용사'로 호칭이 바뀌며 탈북자를 영웅시했다. 1960~70년대 당시 월남귀순자 환영식을 서울시청 광장이나 장충단공원에서 대규모로, 공개적으로 개최하면서 남한의 체제의 우월성을 국내외에 과시하려고 하였다. 한편 서울시는 월남귀순자에게 서울시민증이나 행운의 열쇠 등을 수여하면서 귀순을 환영했다./r/n/r/n* 국가유공자및월남귀순자특별원호법/r/n* 월남귀순용사특별보상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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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포츠 인사환영회
예나 지금이나 스포츠 선수들이 국제무대에서 우수한 성적으로 돌아올 때 그들의 개선을 환영한다. 특히 국제적 위상도 낮고, 경제적으로도 가난했던 시절, 국민들에게 희망을 준 스포츠 영웅에게 열광하는 것은 당연한 일이었다. 세계여자농구 명예의 전당에도 헌액된 여자농구의 박신자, 각종 수영대회를 석권한 아시아의 물개 조오련, 몬트리올올림픽에서 한국에 첫 금메달을 안긴 레슬링의 양정모, 파나마에서 4전5기 신화를 쓴 복서 홍수환, 서울아시안게임에서 새 희망의 롤모델로 떠올랐던 임춘애 등 수많은 스포츠 영웅들이 수많은 시민들의 환영 속에 카퍼레이드 또는 환영대회의 주인공이 되었다./r/n/r/n* 위키백과(https://ko.wikipedia.org)/r/n* 동아일보/r/n* 경향신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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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능올림픽
국제 기능 올림픽 대회는 청소년 근로자들의 직업기능을 겨루는 국제대회로 대한민국은 1966년 15회 올림픽 때부터 참여하였다. 1977년 제23회 대회에서 첫 대회 우승을 한 후, 한국은 메달 갯수와 금메달 수에 있어 최정상급의 성적을 올려왔다. 첫 우승한 1977년 귀국한 선수단은 거리 퍼레이드를 할 정도로 전국민적인 환영을 받았으며, 금메달 수상자들에게 동탑산업훈장, 은메달 수상자에게 철탑산업훈장, 동메달 수상자에게 석탑산업훈장, 대회장특상 수상자에게는 산업포장이 수여되었다./r/n/r/n* 국제기능올림픽대회 한국위원회(http://skill.hrdkorea.or.kr)/r/n* 한국민족대백과(http://encykorea.aks.ac.kr) /r/n* 두산백과(http://www.doopedia.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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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월 항쟁(노동자 대투쟁)
1987년 6월 10일부터 6.29 선언이 있기까지 약 20일 동안 계속된 민주화시위를 일컬어 '6월 항쟁'이라고 부른다. 1987년 1월 서울대생 박종철이 대공분실에서 숨을 거둔 것을 시작으로 촉발된 시위는 6월 9일 연세대생 이한열이 시위 도중 경찰이 쏜 최루탄에 맞아 사망하면서 6월 항쟁의 도화선이 되었다. 1987년 7월 9일 이한열 열사의 장례식은 민주국민장으로 치뤄졌는데 연세대학교 본관→신촌로터리→서울시청 앞→광주 5.18묘역 순으로 이동하며 노제를 진행했었다. 당시 서울시청 앞 추모인파는 100여만에 이르렀다고 한다./r/n/r/n* 민주화운동기념사업회(http://www.kdemo.or.kr)/r/n* 한국근현대사사전(한국사사전편찬회, 가람기획, 20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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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88년 서울올림픽
제24회 서울 올림픽은 1988년 9월 17일부터 10월 2일까지 서울에서 개최되었다. 이 대회는 12년 만에 IOC 회원국 중 대부분인 160개국이 참가한 역대 최대 규모의 올림픽으로 한강의 기적으로 대변되는, 대한민국의 발전상을 상징하는 행사로 알려져 있다. 이 대회에는 12년 만에 IOC 회원국 중 대부분인 161개국에서 약 13,600명이 참가하여 23개 정식종목, 3개 시범종목, 2개 전시종목을 겨루었다. 우리 선수단은 금메달 12개, 은메달 10개, 동메달 11개로 종합 4위를 하였다. 대회 슬로건은 "세계는 서울로, 서울은 세계로", 대회 마스코트는 상모를 쓴 아기 호랑이를 형상화한 '호돌이(HODORI)', 대회 휘장은 삼태극 문양이었다./r/n/r/n* 국가기록원(http://www.archives.go.kr)/r/n* 한국민족대백과(http://encykorea.aks.ac.kr) /r/n* 두산백과(http://www.doopedia.co.kr)/r/n* 서울올림픽자료실(http://library.kspo.or.kr)/r/n* 위키백과(https://ko.wikipedia.org)"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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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86년 서울 아시아 경기대회
1986년 제10회 서울 아시아 경기대회는 1986년 9월 20일부터 10월 5일까지 서울에서 개최되었다. 이 아시안게임은 2년 뒤 올림픽을 성공적으로 개최하기 위한 리허설 성격이 강해서 이 대회가 진행된 경기장과 시설은 1988년 서울올림픽 때 그대로 활용되었다. 이 대회는 사상 최대 규모로 27개국 선수단 4,839명, 세계 주요 스포츠기구의 대표 65개국 947명, 42개국 4,565명의 보도진이 참가해 규모면에서 역대 어느 대회보다 성대히 진행되었다. 당시 대륙 단위의 국제경기대회를 개최한 적이 없는 대한민국이 대규모 국제대회의 준비 및 운영경험을 축적하고, 대회를 성공적으로 마쳐서 올림픽 개최에 대한 자신감을 갖게 되었다. /r/n/r/n* 국가기록원(http://www.archives.go.kr)/r/n* 한국민족대백과(http://encykorea.aks.ac.kr) /r/n* 두산백과(http://www.doopedia.co.kr)/r/n* 서울올림픽자료실(http://library.kspo.or.kr)/r/n* 위키백과(https://ko.wikipedia.org)"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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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28 서울수복
9.28 서울수복은 1950년 한국전쟁에서 6월 28일 북한군에게 점령당한 수도 서울을 한국군과 유엔군이 같은 해 9월 28일 탈환한 일이다. 서울시는 이 날을 기념하여 갖가지 서울수복 기념행사를 지금까지도 개최하고 있다. 한편 1955년 1955년 폐허가 된 국토를 종단하며 국민의 사기를 북돋우고 대한민국 재건 의지를 고취하기 위해 처음으로 개최된 '9.28 수복기념 부산-서울간 역전경주대회(마라톤)'는 2015년부터 대회명칭이 '한반도통일 대역전경주대회: 한라에서 백두까지'로 변경되어 명맥을 유지하고 있다./t/r/n/r/n* 서울육백년사(http://seoul600.seoul.go.kr)/r/n* 한국민족대백과(http://encykorea.aks.ac.kr) /r/n* 두산백과(http://www.doopedia.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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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1 국군의 날
1950년 10월 1일은 한국군이 남침한 북한군을 반격한 끝에 최초로 38선을 돌파한 날로서, 이 날의 의의를 살리기 위하여 국군의 날로 지정하였다. 국군의 날은 1956년에 정식 국가 기념일으로 제정되어 1976년부터는 공휴일이 되었으나 1990년 공휴일에서 제외되었다. 이날에는 육군·해군·공군·해병대 및 육군사관학교, 해군사관학교, 공군사관학교, 육군3사관학교, 국군간호사관학교 생도들의 사열과 시가행진 등의 각종 기념행사가 열리기도 한다. 하지만 남북관계와 국제여건의 변화에 따라 이러한 기념행사의 규모도 신축적으로 하고 있다. /t/r/n/r/n* 한국민속대백과(http://folkency.nfm.go.kr) /r/n* 한국민족대백과(http://encykorea.aks.ac.kr) /r/n* 두산백과(http://www.doopedia.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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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15 광복절
광복절은 일제 강점기에서 해방된 것을 기념하고, 대한민국 정부수립을 경축하는 날로 매년 양력 8월 15일이다. 이 날의 의의를 고양하고자 경축식을 비롯하여 전국적으로 기념 행사를 거행하며, 전국의 모든 가정에서 태극기를 게양하도록 권장하고, 정부는 저녁에 외교사절 등을 초청하여 경축연회를 베푼다. 광복절 기념 행사는 1970년부터 대통령이 참석하는 행사가 되었으나, 1974년 기념식장에서 영부인 암살 사건이 발생하여 우여곡절을 겪었고, 기념식 장소는 중앙국립극장, 세종문화회관, 독립기념관 등으로 바뀌었다./r/n/r/n* 한국민속대백과(http://folkency.nfm.go.kr) /r/n* 한국민족대백과(http://encykorea.aks.ac.kr) /r/n* 두산백과(http://www.doopedia.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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권농일
해방이 되면서부터 일손이 부족한 농촌의 모내기를 지원하기 위해 시작된 권농일은 1959년까지는 6월 15일에 기념식을 가졌다. 그 이후 모내기 시기가 차츰 빨라짐에 따라 1960년부터 1972년까지는 6월 10일로 닷새 앞당겼다. 그 뒤 모내기 일손을 더 쉽게 지원하기 위해 1973년부터는 기념식을 폐지하고 6월 첫째 주 토요일로 기념일을 바꾸었다. 11년 후인 1984년부터는 또다시 5월 넷째 주 화요일로 날짜를 앞당겼으나, 현재는 거의 유명무실하게 흔적만 전해질 뿐이다. 서울시 차원에서도 1960~70년대에 여러 서울시장들이 솔선수범해서 시 공무원과 함께 모내기 등 농가일손돕기를 진행하였다./t/r/n/r/n* 한국민속대백과(http://folkency.nfm.go.kr) /r/n* 한국민족대백과(http://encykorea.aks.ac.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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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처님오신날 봉축탑
불교에서 부처님 오신날을 맞아 등불을 켜는 것은 어둠과 번뇌를 물리치고 영원한 진리의 광명을 밝힌다고 하여 사월 초파일 부처님 오신날에는 각종 연등행사가 개최된다. 서울시청 앞 광장에도 매년 부처님 오신날을 기려 연등행사가 열리는 데 대표적인 게 봉축점화식이다. 1973년 당시 언론에도 5천여명의 신도들이 시청 앞 광장에서 봉축점화식을 연다는 기사가 나왔다. 서울시청 앞에 봉축점화를 위해 커다란 연꽃이나 석탑 등 불교를 상징하는 조형물이 등장하여 봉축분위기를 더했다./r/n/r/n* 경향신문/r/n* 동아일보/r/n* 매일경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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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버이날
지금의 5월 8일 '어버이날'은 1970년대 초반까지 '어머니날'이었다. 1956년부터 5월 8일을 '어머니날'로 지정하여 경로효친의 행사를 하여오는 과정에서 ‘아버지의 날’이 거론되어 1973년에 ‘어버이날’로 변경, 지정하였다. 이 날에는 각 가정에서 자녀들이 부모와 조부모에게 카네이션을 달아드리고 감사의 뜻으로 선물을 하거나 효도관광에 모시기도 한다. 서울시는 이날을 전후하여 ‘경로주간’을 설정하여 양로원과 경로원 등을 방문, 위로하고, 민속놀이 및 국악행사 등으로 노인들을 위로하고, /r/n'모범어머니상' 등을 수여하기도 했다./r/n/r/n* 한국민속대백과(http://folkency.nfm.go.kr) /r/n* 한국민족대백과(http://encykorea.aks.ac.kr)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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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린이날
지금의 5월 8일 '어버이날'은 1970년대 초반까지 '어머니날'이었다. 1956년부터 5월 8일을 '어머니날'로 지정하여 경로효친의 행사를 하여오는 과정에서 ‘아버지의 날’이 거론되어 1973년에 ‘어버이날’로 변경, 지정하였다. 이 날에는 각 가정에서 자녀들이 부모와 조부모에게 카네이션을 달아드리고 감사의 뜻으로 선물을 하거나 효도관광에 모시기도 한다. 서울시는 이날을 전후하여 ‘경로주간’을 설정하여 양로원과 경로원 등을 방문, 위로하고, 민속놀이 및 국악행사 등으로 노인들을 위로하고, /r/n'모범어머니상' 등을 수여하기도 했다./r/n/r/n* 한국민속대백과(http://folkency.nfm.go.kr) /r/n* 한국민족대백과(http://encykorea.aks.ac.kr)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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식목일
식목일은 1949년 대통령령으로 제정되었는데 이날은 신라가 삼국통일의 성업을 완수한 날이자 조선 성종이 선농단에 나아가 직접 밭을 일군 날에 해당한다. 식목일은 1949년 처음 공휴일로 정해진 뒤 1960년 3월 15일 사방의 날을 대체 지정하면서 공휴일에서 제외되었다가 1961년 식목의 중요성이 다시 대두되어 공휴일로 부활되었다. 그후 여러 차례 변경되었다가 2006년부터 기념일로 변경되어 공휴일에서 제외되었다. 이 날은 전국의 직장·학교·군부대·마을 단위별로 토양에 적합한 나무를 심는다./r/n/r/n* 한국세시풍속자료집성:현대신문편(1946~1970)(국립민속박물관, 2006. p.150~157)/r/n* 한국민족대백과(http://encykorea.aks.ac.kr) /r/n* 4월의 모든 역사-한국사(이종하, 디오네, 20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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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1절
1919년 3월 1일에 일어난 3.1 운동을 기념하기 위하여 1949년 「국경일에 관한 법률」에 의해 3.1절을 국경일로 정해졌고, '관공서의공휴일에 관한 규정'으로 공휴일로 지정되었다. 이날 정부에서는 기념식을 베풀어 순국선열들을 추모·애도하는 묵/r/n념을 올리며, 민족정신을 함양하는 각종 기념행사와 함께 각계 인사들이 보신각에 모여 여러 시민들이 보는 앞에서 보신각 타종 행사를 가졌다. 일제의 압제에서 벗어나기 위해 전국 방방곡곡의 남녀노소를 가리지 않은 많은 사람들이 1919년 3월 1일 봉기한 숭고한 의미를 되새기고자 이날 보신각종을 31번 쳤다. 오늘날에도 3.1절 보신각 타종 행사는 계속되고 있다./r/n/r/n* 한국세시풍속자료집성:현대신문편(1946~1970)(국립민속박물관, 2006. p.150~157)/r/n* 한국민족대백과(http://encykorea.aks.ac.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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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 지하철 4호선
지하철 4호선은 3호선과 함께 건설업체 컨소시엄에 의해 사철 철도로 건설될 계획이었으나 사업성 문제로 서울특별시 지하철건설본부가 건설하고 지하철공사(현 서울메트로)가 운영하게 되었다. 또한 4호선은 용산구 통과를 위해 용산 미군기지 영내를 통과해야 하나 불가피하게 우회하게 되어 당초 예정에 없던 경로로 건설하면서 약간의 문제도 있었다. 1985년 상계역에서 한성대입구역까지 1차 완공된 이후 지하철 3호선과 함께 도심을 대각선으로 관통하는 형태로 건설되었고, 1994년 과천선과도 연결되었다./r/n/r/n* 서울행정사(서울시 시사편찬위원회, 1997년) /r/n* 서울육백년사(http://seoul600.seoul.go.kr)/r/n* 한국향토문화전자대전(http://www.grandculture.net) /r/n* 위키백과(https://ko.wikipedia.org)"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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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 지하철 3호선
지하철 3호선은 지하철 2호선의 역할을 높이고 이용률 증대를 위해 지하철 4호선과 함께 도심을 방사형으로 관통하는 노선으로 계획 건설되었다. 3호선은 서북쪽에서 동남쪽으로, 4호선은 동북쪽에서 서남쪽으로 관통하는 형태가 된 것이다. 1985년 7월 12일 구파발역~독립문역 구간이 처음 개통되었으며 이후 1985년 10월 18일 독립문역~양재역, 1990년 7월 13일 지축역~구파발역, 1993년 10월 30일 양재역~수서역, 2010년 2월 18일 수서역~오금역 구간이 개통되었다./r/n/r/n* 서울행정사(서울시 시사편찬위원회, 1997년) /r/n* 서울육백년사(http://seoul600.seoul.go.kr)/r/n* 한국향토문화전자대전(http://www.grandculture.net) /r/n* 위키백과(https://ko.wikipedia.org)"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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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 지하철 2호선
지금의 순환노선 방식의 지하철 2호선은 서울 3핵화(강북도심, 영등포도심, 영동도심) 도시구상에서 비롯되었다. 1980년 10월에 첫 개통식이 열린 하철 2호선 지하철은 순환노선의 형태를 띄어 1호선 혼잡을 완화한 효과가 있었다. 또한 1986년 서울 아시안 게임과 88서울 올림픽을 대비한 측면도 있다. 최초 노선은 1980년 10월 31일 신설동에서 종합운동장간 8km 구간이었다. 이후 교대, 성수 등으로 이어졌고, 1983년 성수-을지로입구 3단계 구간이 연장되면서 성수지선이 분리 되었고 신정지선까지 개통되어 현재의 형태를 이루었다./r/n/r/n* 서울행정사(서울시 시사편찬위원회, 1997년) /r/n* 서울육백년사(http://seoul600.seoul.go.kr)/r/n* 위키백과(https://ko.wikipedia.org)/r/n* 한국민족대백과(http://encykorea.aks.ac.kr) /r/n* 두산백과(http://www.doopedia.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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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 택시
1912년 서울에 처음으로 등장한 택시는 1950년대에는 미군의 지프차를 개조해 만든 시발택시가 인기였다. 1956년 개인택시 면허제가 시작되고, 1970년 서울에 콜택시가 처음으로 등장했다. 1972년 김포공항을 이용하는 승객 편의를 위해 처음으로 공항택시가 생겨났으며, 1979년에 서울지역에 1,250대의 호출택시가 등장해 고급택시로서 외국 관광객 수송에 기여했다. 그리고 서울올림픽 개최를 앞둔 1988년 4월 중형택시제도가 도입됐고, 1992년 12월에는 개인택시를 확대한 모범택시가 등장했다./r/n/r/n* 서울행정사(서울시 시사편찬위원회, 1997년)/r/n* 한국의 전통 사회 운송기구(최운식 저, 이화여자대학교출판부, 2007)/r/n* 한국의 육상 교통(최운석 저, 이화여자대학교출판부, 1995)/r/n* 서울육백년사(http://seoul600.seoul.g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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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가장(국장, 국민장, 시민장)
2011년 법률 개정으로 국가장으로 통합되기 전에는 '국장·국민장에 관한 법률'에 규정된 바에 따라 국장과 국민장 두가지로 나뉘어져 있었다. 국가장은 '국가 또는 사회에 현저한 공훈을 남김으로써 온 국민의 추앙을 받고 서거한 자의 장의'로 그 대상자는 ▲전직·현직 대통령 ▲대통령 당선인 ▲국가 또는 사회에 현저한 공훈을 남겨 국민의 추앙을 받는 사람이다. 지금(2015.12.31 현재)까지 국장은 두번, 국민장은 15번, 국가장은 한번이 치뤄졌으며, 서거한 역대 대통령의 경우에는 국장(박정희, 김대중), 국민장(최규하, 노무현), 국가장(김영삼), 가족장(이승만, 윤보선) 등 다양한 형식으로 장례가 치뤄졌다. /r/n/r/n* 국장·국민장에 관한 법률/r/n* 국가장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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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학로
대학로는 서울시 종로5가교차로에서 혜화동로터리까지를 잇는 도로이다. 과거 이 도로에 서울대학교 법대와 문리대학이 자리잡고 있었던 동숭동 캠퍼스가 원래 이 곳에 있었기 때문에 이 이름이 붙여졌다. 대학로라는 공식적인 도로명이 붙은 것은 1965년이지만 1975년 서울대학교가 관악구 신림동으로 옮겨가면서 그 자리에 마로니에 공원이 조성되고, 1985년 정부주도로 문화예술의 거리가 조성되면서 동숭동 대학로라는 이름이 널리 알려지게 되었고, 서울의 대표적인 젊음과 문화의 공간으로 자리잡았다./r/n/r/n* 한국관광공사(http://korean.visitkorea.or.kr)/r/n* 한국민족대백과(http://encykorea.aks.ac.kr) /r/n* 두산백과(http://www.doopedia.co.kr)/r/n* 위키백과(https://ko.wikipedia.org)/r/n* 나무위키(https://namu.wiki)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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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운상가
세운상가는 1968년 서울시 종로구에서 만든 약 1km 길이의 대한민국 최초의 주상복합 건물이자 초대형 상가군이다. '세계의 기운이 이곳으로 모이라' 라는 뜻을 담은 세운상가는 일종의 입체도시를 만들고자 했던 거창한 계획에서 출발하였으나 각 건설사별로 건물을 따로 짓는 바람에 그 계획은 사실상 무산되었다. 완공된 세운상가군은 아파트도 흔치 않은 당시 최고의 시설을 자랑했기 때문에 큰 인기를 끌었으나 1980년대를 거치면서 점점 슬럼화되기 시작했고, 지금은 애물단지 수준으로 전락했다. 한편 세운상가는 용산 전자상가(1987년)가 들어서기 이전까지 각종 전자제품과 컴퓨터 및 컴퓨터 부품 등을 취급하던 곳으로 유명했었다. /r/n/r/n* 서울 도시계획 이야기 1(손정목 저, 한울, 2003)/r/n* 나무위키(https://namu.wiki)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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덕수궁(경운궁)
덕수궁은 서울 중구 정동에 있는 조선의 궁궐로서, 1907년 순종 즉위 후 궁호가 경운궁에서 덕수궁으로 변경되었다. 덕수궁의 원래 면적은 현재보다 넓었으나, 일제강점기를 거치면서 축소되었고, 해방 후에도 덕수궁 담장들이 뒤로 밀려지고 또한 담장에서 철책으로, 다시 돌담으로 바뀌는 등 많은 변화가 있었고, 정문인 대한문도 여러 차례 뒤쪽으로 밀리기도 했다. 덕수궁은 대한제국의 황궁의 상징적인 의미도 있지만 서울시청과 가깝고, 상대적으로 타 궁궐보다 접근성이 좋아서 1960~1970년대에 덕수궁에서 서울시와 정부가 개최하는 크고 작은 행사가 자주 열렸다. /r/n/r/n* 덕수궁(http://www.deoksugung.go.kr)/r/n* 두산백과(http://www.doopedia.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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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공화국 직접선거
1960년 3.15 부정선거와 그에 따른 4.19 혁명이 발생하여 제1공화국이 몰락하고, 그해 6월 제3차 헌법 개정이 이루어져 내각책임제가 도입되었다. 우리나라 의정사상 최초로 양원을 구성한 제2공화국 첫 번째 국회의원선거가 1960년 7월 29일 실시되었다. 또한 1960년 11월 '지방자치법'이 새로이 제정·공포되면서 임명제였던 서울특별시장을 12월 29일 시민의 직접선거에 의해 선출하였다. 이때 김상돈 시장이 당선되어 최초의 민선 서울특별시장직을 수행했으나 1961년 5.16군사정변으로 사퇴하였다./r/n/r/n* 국가기록원(http://www.archives.go.kr)/r/n* 위키백과(https://ko.wikipedia.org)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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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통시장의 변모
시장은 삼국시대 이래 장, 장시 등의 용어로 불리었고, 19세기 개항기부터 ‘시장’이라는 용어가 사용되어 오늘에 이르렀다. 1980년대 슈퍼마켓과 1990년대 대형마트가 등장하기 전까지 동대문과 남대문 시장 등, 전통시장이 서울의 상권을 주도했다. 일례로 1961년 44개이던 시장은 1979년 334개로 폭증할 정도였다. 그 후 유통시장의 다양화와 상거래 방식의 변화로 상권의 중심에서 밀려났지만, 과거의 향수를 간직한 형태 등 다양한 형태 변화를 모색하며 서민의 생활과 문화의 한 축으로 존재하고 있다. 현재는 남대문시장과 경동시장, 중부시장이 가장 큰 시장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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과거의 학교
1960년대까지 전후 사회기반 시설 복구 사업의 일환으로 곳곳에서 교육시설 복구도 이루어 졌다. 이시기 학교는 재반시설의 부족 속에서도 사회발전의 원동력이 될 인재 양성을 위한 역할을 수행해 나갔다. 4.19혁명 이후 자유당 정부의 독재 잔재 일소를 위한 교육분야의 민주화 시도가 있었으나, 곧바로 집권한 군사정부에 의한 '조국근대화'를 위한 '교육을 통한 인간개조 운동'을 펼쳐 나갔다. 현재는 2006년 ‘지방교육자치에 관한 법률’의 개정 이후 직접선거로 교육감을 선출하고 있다./r/n/r/n* 위키백과(https://ko.wikipedia.org)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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효창공원과 효창운동장
서울시 용산에 소재한 효창 공원은 원래 정조의 첫째 아들 문효세자와 그의 어머니 의빈 성씨의 무덤으로 효창원이었으나, 일제 강점기 때 두 무덤은 서삼릉으로 강제 이장 당하고, 이름도 효창공원이 되었다. 효창공원에는 김구의 묘소를 비롯하여 대한민국 임시정부 요인들의 묘지가 있어 3.1절, 광복절 등 주요행사장소로 쓰였다. 공원 주변에는 백범기념관, 원효대사 동상, 반공기념탑, 효창운동장이 있다./r/n/r/n* 두산백과(http://www.doopedia.co.kr)/r/n* 위키백과(https://ko.wikipedia.org)/r/n* 나무위키(https://namu.wiki)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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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 지하철 1호선
1970년 서울의 심각한 교통난 해소를 위한 항구적 대책인 지하철을 건설하라는 대통령 지시가 떨어졌다. 1971년 지하철 1호선 기공식을 시작으로 1974년에 완공된 1호선은 서울역과 청량리역을 잇는 노선이라 종로선이라고도 불렸다. 지하철 1호선 공사는 국내 초유의 공사였지만 당시 지하철 최단공기 수립, 최소공사비 기록을 세웠다. 부산항을 통해 수입된 최초 전차 6량은 148명, 214명 정원으로 110km까지 속력을 내는 것이었다. 이후 국철이 더해지면서 수도권지역으로 사통팔달 연결되고 이용객이 늘면서 지옥철이라 불리기도 했다. 현재까지 8개 노선과 함께 가장 비중이 큰 대중교통 수단으로 활용되고 있다./r/n/r/n* 서울행정사(서울시 시사편찬위원회, 1997년) /r/n* 서울육백년사(http://seoul600.seoul.go.kr)/r/n* 대한민국경제사(석혜원, 미래의 창, 2012)/r/n* 위키백과(https://ko.wikipedia.org)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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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 시내버스
한국전쟁 후 서울이 수복되고, 월남 인구의 서울 집중으로 교통수요가 늘어 서울시에서는 교통난을 해결하기 위한 방안으로 1966년 서울시가 직접 운영하는 시영버스를 운행하였다. 초기에 시영버스는 전차가 운행되지 아니하는 구간에 운행되어 전차에 의존하던 도시 교통이 전차와 시내버스의 2원체제로 변화했다. 1974년 9월 서울시영버스 전량을 공매하면서 시영버스 운행의 막은 내렸다. 버스는 1960년대 이전까지 군용 쓰리쿼터나 20인승의 마이크로 버스가 주였으며 60년대에도 상당수가 9인승 소형버스인 합승이 많았다. 하지만 교통 수요 증가로 38인승으로 개편되면서 버스는 본격적으로 시내 교통을 분담했다./r/n/r/n* 서울행정사(서울시 시사편찬위원회, 1997년) /r/n* 한국의 전통 사회 운송기구(최운식 저, 이화여자대학교출판부, 2007)/r/n* 한국의 육상 교통(최운석 저, 이화여자대학교출판부, 1995)/r/n* 서울육백년사(http://seoul600.seoul.g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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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역고가도로
산업화가 진행되던 1970년대~1980년대까지만 하더라도 하늘 위로 지나가는 콘크리트 고가차도는 근대화의 상징으로 추앙받았고, 실제로도 파이프처럼 주요지점들을 연결하여주며 그 기능을 충실히 하였다. /r/n특히 서울역고가도로는 철도도 횡단하고 신호없이 서울역의 동서를 연결하여주는 구실도 하였다. /r/n하지만 2000년대 들어서 고가도로의 노후화와 도시미관, 교통흐름 개선 등을 위해 고가도로가 하나씩 철거되었다. /r/n2014년 9월 서울시는 1970년 첫 구간이 개방된 이후 44년 동안 이용되어 온 서울역 고가도로를 철거하는 대신 재생하여 녹지 및 보행자 전용 공간으로 전환하겠다는 계획을 발표하였고, 2015년 12월부터 교통을 통제했다. '서울역 7017'이라 불리는 이 프로젝트는 서울역고가 뿐 아니라 서울역 일대를 고부가 가치로 만드는 도시재생의 선도사업이며 2017년 시민들에게 개방할 예정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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숭례문(남대문)
숭례문은 서울 4대문 중 남쪽에 있다하여 남대문으로 불리고 있으며 1962년 국보 1호로 지정되었다. /r/n숭례문은 한국전쟁 당시 파괴가 되었는 데 1961년 5월이 되어서야 남대문의 해체 보수에 착수하여 1963년 5월 준공하였다. /r/n그 후 서울 도심에 위치하여 주변 개발로 도로 중심에 고립되었다 하여 2006년 중앙통로를 일반인에 개방했다가 2008년 2월 방화로 인해 목조 건물 일부와 석축기반을 남기고 2층 누각이 모두 소실된 참사를 겪었다. /r/n그후 5년 뒤인 2013년에 복구되어 시민에게 공개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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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 공설스케이트장
1960년 신설동에 서울시 공설 무료 스케이트장이 처음 문을 열었으며, 이후 효창구장, 서울대공원, 여의도 등에도 스케이트장이 개설되어 겨울철 운동 및 어린이 놀이문화로 활용되었다. /r/n그후 2004년부터 서울광장 스케이트장도 다양한 형태로 변화하며 운영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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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시청 앞 크리스마스 트리
한 해를 마무리하는 12월이면 서울 곳곳에 거대한 크리스마스 트리를 볼 수 있다. 서울시청 앞 광장에도 매년 12월에 크리스마스 트리가 세워져 이제는 당연한 듯 보인다. /r/n서울시청 앞 광장에 처음으로 크리스마스 트리가 세워진 것은 정확하지 않으나 1965년 당시 언론에 서울시청 앞 광장에 2600개의 전구로 장신된 20m 높이의 매머드 크리스머스 트리를 세웠다는 기사가 처음으로 등장한다. /r/n이렇게 등장한 서울시청 앞 크리스마스 트리는 매년 이어져 오다가 1973년부터 1979년까지 에너지 절약시책에 따라 7년 동안 자취를 감추었었다. 서울시청 앞에 트리가 재등장한 것은 1980년. 그 후 서울시청 앞 크리스마스 트리는 매년 12월 설치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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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시 행정 서비스 변화
전후 복구기인 1960년대 중반까지 동사무소 건설이 빠르게 진행되었다. 호적 업무 중심으로 민원실이 운영되고 확대되었다./r/n1967년에는 바쁜 직장인들을 위해 야간 연장업무를 하며 야간시청을 운영하기도 하였다. 또한 1966년 민원배달 업무를 시작하며 가호 방문을 진행하였고, 1970년 민원신고센터 전화가 설치 되기도 하였다. /r/n1975년과 1999년 주민등록증 갱신이후 2015년 새로운 주민등록증 발급을 추진 중이다. 1982년 서울시 종합민원실과 전화민원신고센터가 설치되었고, 1988년 시민불편신고센터가 설치되었다. /r/n그리고 각종 장비의 발달로 점차 자동화 시스템이 도입되었고, 현재는 인터넷의 발달로 각종 민원업무가 원격으로 운영되기도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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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의 전차
서울전차는 1899년부터 1968년까지 서울 시내에서 운행했던 노면전차를 말한다. /r/n한국전쟁 후, 전쟁으로 파괴된 전차선을 복구하고, 전차를 미국에서 지원받아 전차 운행이 재개되었으나 1968년대에 이르러서 전차운행으로 인한 적자누적, 노면전차로 인한 도로 체증 등으로 전차사업이 외면받게 되었다. /r/n당시 서울시는 세계적 전차 폐지 흐름에 따라 철거 방안이 가시화되고, 장기적으로 지하철 건설을 통해 해결한다는 구상 하에 철거를 결정했다. /r/n1968년 11월 30일 서울전차의 전 노선이 운행 정지된 후, 1974년 수도권 전철이 개통할 때까지, 서울 시내 교통은 전적으로 버스에 의존하게 되었다.